둘째인 양사언은 1546년 문과 병과로 급제하며 운정기(雲亭記)를 지어 필명을 얻었다. 대동승을 거쳐 평안남도 삼등, 함흥, 평창, 강릉, 회양, 안변, 철원 등의 수령을 지냈다.
막내인 양사기는 1553년 별시 문과 병과에 16위로 급제한 후 관계로 나가 호조좌랑을 거쳐 홍원, 북청, 광주, 풍천, 원주, 영해, 부평, 안변의 수령을 지냈다. 가는 곳마다 청렴한 생활로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살펴주어 칭송을 받았다.
특히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형인 양사언이 함경남도 안변에 있는 조선 태조의 증조부인 익조의 능인 지릉의 화재사건으로 해서에 유배되었을 때 일곱 달 동안 형 옆에 엎드려 잠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양사기의 어머니는 후실이었다. 그녀가 13살 때의 일이었다. 혼자 집을 보고 있는데 길손이 문을 두드렸다. 길손은 말이 지쳐서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으니 잠깐 쉬어가게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소녀는 제가 말죽을 쑤어 드리지요라고 말하고는 말죽뿐만 아니라 길손에게도 돗자리를 내다 깔아드리고 나무 밑에서 쉬게 했다.
소녀는 말이 지쳤으면 손님께서는 얼마나 시장하시겠습니까?라며 길손을 위해 밥상을 차려냈다. 길손은 식사를 하며 먼발치로 소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소녀는 아무리 보아도 영리하고 심부름하는 태도가 맵시 있어 칭찬할 만했다. 몇 마디 물어보았으나 대답이 나직하고 다소곳해 귀엽기 그지없었다. 소녀의 행실에 매료된 길손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길손은 그 고을 사또였다. 사또는 늘 지니고 다니던 부채를 소녀에게 선물로 건네며 채단처럼 생각하라고 말했다.
'사립문 닫지 않고… 바라보니
밤은 깊어 바람과 이슬 옷을…
양산관에는 고운 꽃이 많아서…
날마다… 돌아올때 돌아오지 않네'
양사기 기다리는 심정 시로 남겨
그것이 인연이 되어 후일 사또의 후실이 되었던 것이다. 후에 정실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양사기의 어머니가 정실이 되어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그러나 서얼인 두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끼고는 했다. 조선시대 서얼은 관계로 진출할 수 없었던 사회적 제약을 너무 잘 알고 있던 부인이었다.
양사기의 아버지 양휘수가 쉰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상복을 입고 난 부인은 장남 양사준을 똑바로 보며 내가 영감님 성복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동하여 남들이 모를 것입니다. 내가 죽은 후에 사언과 사기가 서자로 불리지 않게 약조해 주면 죽어서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습니다 하고 지니고 있던 칼을 가슴에 대고 폭 엎어졌다. 말릴 틈이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것으로 두 아들이 서자에서 적자가 되었던 것이다.
양사기에게는 애첩이 있었다. 그녀는 풍천부사로 양산에 머물며 돌아오지 않는 양사기를 기다리는 심정이 안타깝게 그려져 있는 시를 남겼다. '정을 담아 붙임'이라는 시제의 연정시에는 외로움과 그리움과 질투심이 배어 있다. '사립문 닫지 않고 먼 길 시름겨워 바라보니/밤은 깊어 바람과 이슬 옷을 적시네/양산관에는 고운 꽃이 많아서/날마다 그 꽃들 보느라 돌아올 때 돌아오지 않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언제 올지 모르니 사립문을 닫지 않고 먼 길을 바라보고 있는 첩의 모습이 처연하다. 양산관은 양사기가 머물던 관소이다. 양산관에 고운 꽃이 많아서 날마다 그 꽃을 보느라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에서 열불이 날 일이다. 질투심은 여심이 지닌 무서운 칼이며 지극한 사랑이다. 여자에게만 질투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기형도 시인은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를 남겼다.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희망이 질투였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