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국무회의에서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을 통과시키며 이같이 말했다.
평택항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숨진 故 이선호 군의 장례식을 찾았을 때도 정부는 '안전한 나라'를 약속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정부가 공언한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첫발'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물론, 노동자, 기업, 수사기관, 법원 등 사회 전체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법 시행 전부터 경영책임자 등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느라 급급한 모습인 데다, 노동자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주요 조항들이 빠져 현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 8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중대재해(중대산업·시민재해) 예방 대책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으로 사회 곳곳이 분주하다. '산업재해(산재) 예방 강화'라는 기존 법 취지에 따라 안전체계를 강화가 필수적인데, 일부 로펌들은 고용노동부 전관을 앞세워 중대재해법 전문팀을 구성하는 등 'CEO 방어막'을 세우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경영책임자 등에게 노동자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부여한다. 일터에서 더는 노동자가 죽지 않도록 안전체계를 강화하자는 취지다. 안전 의무를 다하지 못해 노동자 1명 이상이 사망하는 등 재해가 발생하면 사업 책임자, 단체장 등이 처벌 대상이다.
민간서는 'CEO 방어막' 구축 조짐
이에 경기도는 도지사를 총괄책임자로 하는 안전·보건 관리 전담조직을 구성하고 중대재해 예방·대응 실무 매뉴얼 제작해 31개 시·군과 공공기관 등에 배포할 계획이다. 고용노동부도 관련 가이드북·해설서 등을 제작·배포했으며 중대재해를 담당할 지방노동관서 광역중대산업재해관리과 7곳 지정했다. 법무부도 중대재해·산업재해·산업안전·노동 분야 실무 경험자 등을 대상으로 검사장 임용 접수를 시작하며 수사 역량을 강화하는 모양새다.
안전체계 강화보다, 경영책임자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움직임도 포착됐다. 재해 발생 시 경영책임자 등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자칫 법 취지를 퇴색시킬 수 있는 우려가 크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국내 주요 로펌들은 '중대 재해 대응체계'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나 산업안전보건공단 등 유관기관에서 근무 경력을 앞세운 실무 전문가 20~30명으로 대응팀을 구성한 것이다. 중대재해 대응그룹, 중대재해센터 등 명칭도 다양하다. 실제 광주광역시 화정 아이파크 붕괴 사고 발생 직후 현대산업개발은 국내 최대 법률사무소인 김앤장을 선임해 발 빠른 법률 자문과 형사 대응에 나섰다. 건설업계 등 기업들도 저마다 최고안전책임자 신설·안전보건팀 신설 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최근 기업들이 안전팀을 꾸리는 추세다. 아직 선례가 없다 보니, 안전팀을 별도로 구성하거나 안전관리팀 책임자를 두는 경우가 많다"면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관련 문의도 잇따르고 일부 외국계 로펌은 국내 진출과 동시에 고용노동부와 경찰청, 근로감독관 출신을 채용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주요 로펌이 중대재해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기업들이 안전보건책임자 등을 선임하는 등의 움직이는 보이는 이유는, 중대재해처벌법에서 노동자의 안전·보건 확보 의무가 있는 책임주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해당 법에서 규정한 법인의 경영책임자는 대표이사 등 사업을 대표하고 총괄하는 권한·책임이 있는 사람 또는 대표이사 등에 준하는 책임자로 안전·보건 조직과 인력, 예산을 총괄 관리자다. 사실상 '최종결정권을 가진 정도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는 해석의 여지가 많은 부분을 법적 공방으로 가려내야 한다.
이 때문에 안전총괄이사, 안전보건관리책임자 등만 처벌을 받고 경영책임자는 법의 심판대를 빠져나갈 가능성이 크다. 원청은 책임 없다며 하청 업체 꼬리 자르기식 행태가 모습만 바뀌고 재현된다는 우려다.
특히 화학사고 등으로 발생하는 재해의 경우, 앞선 가습기 살균제 참사만 봐도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하고 경영책임자 등에게 책임이 있다는 인과관계를 밝혀내기 어려운 현실은 여전하다.
게다가 산업재해 사망사고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사업장은 이번 법 적용에서 빠졌다. 노동계가 법이 시행돼도 현장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는 이유다.
로펌들, 실무경험 전문가 대거영입
지난달 고용노동부가 중대재해 발생 등 산업재해 예방조치 의무를 위반한 1천243곳의 명단을 공표했다. 이들 가운데 사망자 1명 이상 등 중대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이 576개소였는데,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은 92곳(약 16%)에 불과했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는 사업장 10곳 중 8곳이 50인 미만 사업장이며 이들은 오는 2024년까지 법 적용이 유예된다. 더구나 지난 2020년 기준 한국산업안전공단이 집계한 산재 사망자 840명 중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274명(32.6%)으로 가장 많았지만, 이들은 아예 처벌 대상에서 제외됐다.
중대재해처벌법 실효성을 높이고 실질적으로 노동자 안전체계가 구축되려면, 법 적용 대상 확대와 명확한 경영책임자의 의무 부여 등을 담은 보완 입법과 함께 제대로 된 수사·법 집행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 본부는 "로펌들이 중대재해 대응에 나서고 기업들이 계약하는 것은 사실상 경영책임자에서 CEO를 빼려는 노력이고 법적 다툼에서 CEO에 의무가 없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라면서 "이들이 이처럼 빠져나갈 수 있도록 모호하게 규정한 책임주체 부분을 명확하게 보완해야 하고 실질적 지배력이 있다면 처벌 대상으로 포함하도록 재해 발생에 대한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조항들을 법에 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시행 예정인 중대재해처벌법 자체로는 현장을 크게 바꾸지 못하겠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은 노동자 안전을 위해 앞으로 부족한 부분을 추가 법 개정으로 보완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 관련기사 3면([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죽음 막을수 있을까·(下)] 실효성 높이는 보완책 필요)
/이시은·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