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 적힌 글귀다.
1980년대 중반 내가 다닌 대학 뒷골목 2층에 '카잔차키스'라는 카페가 있었다. 신입생 시절 종종 가곤 했던 차에 하루는 농담반 진담반 주인아저씨에게 물었다. "카잔차키스는 어떤 키스인가요?"라고. 그러자 주인장께서는 친절하게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을 쓴 그리스 소설가라며 이 책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깊은 탐색을 보여주고 있다는 추천의 변까지 덧붙였다. 사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무척 좋아하고 도서관 내 독서 서클 활동까지 했던 나로서는 엄청 무식한 발언을 한 셈이다. 여하튼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그리스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놈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여기 또 불쌍한 것이 있구나. 이 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카잔차키스는 국적 불문, 품성 불문 종국에는 관에 누워 구더기 밥이 되어 버릴 유한한 존재, 또 가슴에 선과 악을 동시에 품고 있는 양면성을 가진 야누스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저격하고 있다. 동시에 깊은 연민도 보내고 있다. 이 관점은 성경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내 마음에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 매 순간 치열하게 다투고 있음을 밝힌 맥락과 동일하다. 바울은 물론 신앙의 능력으로 성령의 법의 우위를 선언하지만 카잔차키스는 객관적인 자세로 무엇이 앞선다 또는 앞서야 한다는 당위적 선언도 유보한다.
이 소설은 3년여의 퇴고를 거친 결과 재미있는 철학서와도 같다. 삶은 책을 통해 지식으로 배우기보다는 경험과 연륜을 통해 채워진다는 것을 지식인 화자와 조르바를 통해 대비시킨다. 자유인의 대명사로 요리사이며 광부이며 사색가인 60대 알렉시스 조르바를 통해 '인생은 무기징역'과 같지만 그래도 살아내야 하고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실존주의 철학 또한 제시한다.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그럼 인간이 자유라는 건데, 결국 자유 없는 인간은 진정 인간으로서 살 수 없다는 주장을 보여주고 있다.
난 힘들고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하여 삶의 고단함이 내 어깨를 짓누를 때 두 가지 방책을 동원한다. 미래시점으로 이동하기와 달달한 소설책 읽기. 그럼 이 문제에서 완전 자유다. 먼저 눈앞의 당면 과제가 다 해결되었을 미래 시점으로 내 몸과 맘을 옮겨 놓는다. 미래 시점은 1주일 뒤이기도 하고, 1년 또는 10년 뒤가 되기도 한다. 세상사 모든 일은 시간 앞에 어떤 형태로든 무력화된다. 조르바도 이야기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이며 여기라고. 또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과 내일 죽을 것처럼 사는 게 결국 같은 거라고.
요즘 '파이어족'이 직장인들의 꿈이 되었다. 회사나 직장이 나를 옭아매는 '괴물'처럼 형상화되기도 한다. 실제 직장에서 어려움으로 삶의 줄을 끊거나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들도 있으니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이 직장인들의 로망일 수 있다. 그런데 설사 직장을 그만두더라도 우린 다른 형태의 경제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현재 내가 있는 이곳에 발을 굳게 딛고 서서 내 마음과 의식은 '자유인 조르바 따라하기'를 해 보면 어떨까. 또 은퇴 이후 위시 리스트를 썼다 지웠다 하며 미래시점으로 이동을 통해 조금은 덜 힘들게 지금을 견디는 방책은 어떨까.
/배수옥 경기도의회 교육기획위원회 정책지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