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9월 당시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보내온 친서를 언론에 흔들어대면서 "김 위원장으로부터 두 통의 편지를 받았다"며 "역사적인 편지", "한 편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앞서 두 사람은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에서 북한 체제안전보장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했다. 2차 회담을 요청하는 김 위원장의 친서 2통은 외교 업적 과시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2019년 2·28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미·북회담은 '하노이 노딜'이라는 외교참사로 끝났다.
전자메일로 인해 친필 편지, 친서가 사라진 시대이다. 친필 편지를 나누는 사이라면 보통 사이가 아니고, 친서는 진심의 표현이라는 무게를 갖는다. 트럼프가 김정은 편지에 홀딱 반한 이유일테다. 일전에 여학생들의 군 위문편지가 문제가 된 것도, 진심이 없는 위문편지를 관행적으로 강요한 문화적 맹목 탓이었다. 겉치레 편지는 발신인과 수신인 모두에게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긴다.
엊그제 청와대 앞에서 북한군에게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유족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받은 편지를 반납했다. 문 대통령은 2020년 10월8일 피살 공무원의 아들에게 친서를 보냈다. 대통령은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심정을 깊이 이해한다"며 "진실을 밝혀낼 수 있도록 내가 직접 챙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정부는 피살 사건과 관련한 정보 공개를 거부했다. 유족들이 정보공개청구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지만 정부는 항소했다.
대통령 편지에 대한 아들의 답장 편지가 가슴을 때린다. "아버지를 월북자로 만드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대통령님의 약속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며 "대통령님의 편지는 주적인 북한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고등학생을 상대로 한 거짓말"이라 했다. 유족들은 증거 없이 정황만으로 아버지가, 남편이, 동생이 월북자로 낙인찍힌데 분노하고 있다.
"이 편지가…수백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받지 않을 만한 편지인가를 생각해본 뒤에야 비로소 봉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편지 쓰는 법을 가르친 친필 편지 내용이다. 대통령의 편지가 길바닥에 반송된 현실이 가슴 아프다. 문 대통령이 진심을 다한 답장으로 유족들에게 다시 마지막 희망이 되어주길 기대해 본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