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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 이태원 거리가 늦은 밤에도 들끓는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외국인들이 몰려드는 이국 풍경에, 이방인과 젊은 층을 겨냥한 다국적 음식점, 카페, 클럽이 흥행을 주도했다. 경리단길로 불리며 전국 'O리단길'의 원조가 됐다. 서울 망리단길, 연리단길, 부산 해리단길, 경주 황리단길, 전주 객리단길이 후계 그룹이다.

잘 나가던 경리단길이 2010년대 후반 급격하게 쇠퇴했다. 2015~2017년 상가 임대료는 연평균 12% 급등했다. 높은 임대료에 수익성이 떨어지자 빈 상가가 늘었고, 발길이 끊긴 거리는 썰렁해졌다. 때마침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했다. 지역 흥행을 이끈 방송인 홍석천도 2019년 장사를 접고 떠났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반복되면서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일대는 '행리단길'로 불리는 신흥 핫플레이스다. 화성 성곽을 따라 카페, 식당, 공방 등 백여 개 넘는 점포가 들어서 있다. 정조가 효심으로 지은 화성행궁과 수원화성의 고즈넉한 풍광이 상권을 후원한다. 날 좋은 주말과 휴일, 유명 식당엔 대기 줄이 선다. 전망 좋은 빈티지 카페 옥상은 '행궁동 깨부수기' 필수 코스다. 차량은 거북이 운행을 하고, 골목길 주차 전쟁이 치열하다.

활력 충만 행리단길에 돌연 먹구름이 짙다. 수년 사이 주택 가격과 상가 임대료가 폭등했다. 동네 시끄럽고, 정신 사납다며 살던 집을 팔고 떠나는 원주민들이 늘고 있다. 쓰레기, 주차, 소음 문제는 지긋지긋한 고질이 됐다.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주민과 상인들 불협화음도 심각하다고 한다.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도 심각한 주차난에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종일 이어지는 행인들 소음에, 빨래 널기도 불편하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먼저 주민들이 떠나고, 늘어나는 상가에 치솟는 임대료가 부담인 상인들이 뒤따르면서 지역이 가라앉는 게 젠트리피케이션의 전형이다.

행리단길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민·관이 투합해 잊혔던 옛이야기를 복원했고, 재화(財貨)를 흡인하는 동력이 됐다. 그런데 경리단길 전철을 밟을지 모를 상황이다. 위기극복을 위한 곱셈의 마력이 절실하다. 주민과 상인, 지자체가 다시 합체가 돼야 한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