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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생 백남준은 일제 치하 경성(서울)의 상류층 자제들만 입학했던 수송국민학교와 경기공립중학교를 거쳐 홍콩에서 유학한다. 한국전쟁 때는 일본으로 넘어가 도쿄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독일 뮌헨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과 음악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시절 전위예술의 전설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아 뉴욕에서 행위예술가로 데뷔한 뒤,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의 비조가 됐다.

청년 백남준이 세계를 유랑하며 예술적 소양을 키울 수 있었던 배경엔 부친의 막대한 재력이 있었다. 아버지 백낙승은 식민지 조선과 독립 대한민국의 거부였다. 직물, 제약, 군수업체를 거느린 재벌의 효시라 할만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재산을 몰수했고, 일제에 협력한 탓에 친일 인명사전에도 올랐다. 만일 백남준이 대한민국에 계속 있었다면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했을지 장담하기 힘들다.

백남준은 1984년 새해 벽두에 최초의 인공위성 예술작품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제작했다. 전 세계인이 동시에 시청하며 자자해진 명성이 고국에도 알려졌다. 1988년 88올림픽을 기념해 1천3대의 TV브라운관으로 비디오 타워 '다다익선'을 제작해 대중과도 친숙해졌다. 그래도 백남준은 여전히 세계인이었고, 한국 대중은 그의 예술보다는 명성에 호감을 가졌다.

그런 백남준이 늘그막에 용인에 자신의 예술혼을 집약했다. 인연의 중심에 경기도가 있다. 2002년 4월 임창열 경기도지사가 백남준 미술관 건립계획을 공표했다. '백남준' 이름 석자가 들어간 유일한 미술관이었다. 감사원은 건립계획 재검토를 권고했지만 경기도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백남준은 미술관 기공 직전인 2006년 1월 타계했지만 '백남준아트센터'는 2008년 10월 용인시 상갈리에 우뚝 솟았다.

올해 탄생 90주년을 맞아 문화계에 백남준 열풍이 불고 있다. 과천현대미술관은 '다다익선'을 리모델링해 영상을 작동시킬 준비에 한창이다. 전국의 백남준 작품 보유 미술관들도 각종 기획전을 펼친다. 그래도 백남준 예술의 중심은 그가 생전에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 명명한 '백남준아트센터'이다. 그의 기일인 29일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백남준의 비디오 서재' 무료 공개를 시작으로 1년 내내 다양한 전시와 행사가 이어진다. 예술 장르를 창시한 천재의 작품과 삶을 만나기에 여기 만한 곳이 없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