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구는 공과 골대와 선수만 있으면 가능한 스포츠이다. 진입장벽이 없고 직관적인 경기규칙 덕분에 세계 어디에서나 남녀노소가 참여하고 관전하며 즐기고 열광한다. '공은 둥글다'는 격언대로 의외의 승부가 속출하는 것도 축구의 매력이다. 덕분에 축구는 많은 나라의 국기(國技) 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 탓에 앙숙 관계인 국가 대항전은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긴다.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축구 때문에 전쟁을 했고, 한·일전은 양국의 자존심 대리전으로 격상한지 오래됐다.
한국, 중국, 베트남의 설날 축구 삼국지가 화제다. 설날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최종지역 예선경기 결과에 삼국 국민의 표정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시리아를 2대0으로 제압한 한국은 월드컵 본선 10회 연속 출전을 확정했다. 10회 연속 출전은 브라질, 독일,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스페인에 이어 여섯번째인 대기록이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위업 만큼이나 대단한 업적이지만 국민들은 덤덤하다. 탈락이 이변이지, 본선 진출은 당연하다는 자신감 때문일 테다.
오히려 중국과 베트남의 설날 축구대첩 결과가 더 흥미롭다. 중국은 최약체 베트남에 1대3으로 패한 충격에 나라 전체가 가라앉았다. 축구팬들은 춘제(중국의 설)를 망친 대표팀에게 '귀국하지 말라'고 악담을 퍼붓고, 한 축구팬은 TV를 때려부쉈다. 본선 진출은 이미 물 건너 간 상태지만 베트남에까지 지자 국가 자존심에 제대로 상처를 입었다.
반면 베트남은 축제 분위기이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대표팀은 월드컵 지역 최종예선 최초 진출, 첫승으로 축구 역사를 새로 썼다. 박항서 매직에 중국이 희생양이 된 드라마에 베트남 전체가 열광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 불편했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베트남에게 이번 승리는 각별한 모양이다. 설날 최고의 선물에 총리는 선수단에 세뱃돈을 뿌렸다.
세 나라는 아시아에서도 음력 설이 명절인 대표적인 국가들이다. 올해 설엔 영어권 국가와 기업들이 음력 설(Lunar New Year)을 중국 설날(Chinese New Year)로 표기하는 문제가 논란이 됐다. 이 문제로 한·중 네티즌 사이에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월드컵 축구 삼국지로 각 나라 설날 분위기는 천당과 지옥이 됐다. 스포츠를 초월한 축구의 영향력을 보여준 장면들이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