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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1908년 강화도 일대 의병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한 '치하야함'.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고종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있던 1907년부터 한일 강제병합까지 전국에서 대규모 의병운동(정미의병)이 일어나 일본에 저항했다. 특히 인천 강화도에서 게릴라전 양상을 띤 의병 항쟁이 전국에서도 가장 거세게 일어났다. 그동안 잊힌 강화 의병 30명의 이름과 투쟁 방식이 최근 새로 발굴돼 눈길을 끈다.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가 7일 펴낸 '우리 지역 독립유공자(의병) 발굴·조사 연구 보고서'를 보면, 일본군은 1908년 4월부터 10월까지 강화도 일대에 육전대(해병대)를 파견해 대대적인 의병 토벌작전을 벌였다.

1907년 8월 군대해산에 반발 봉기
이능권 '대동창의진' 편성 산악전


앞선 1907년 8월 대한제국 강화진위분견대 군인들이 군대 해산에 반발해 봉기한 이후 강화도와 인근 섬, 황해도 일대서 의병운동이 지속했다.

이능권(1864~1909), 김용기(1875~1909), 지홍윤(?~1909) 등이 강화 일대에서 활약한 대표적 의병장이다. 대한제국군 장교 출신 이능권 의병장은 강화 지역 장사들을 모아 '대동창의진'이란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그의 부대는 일진회 회원들을 처단하거나 강화 전등사를 비롯한 산악지대에서 일본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금품 조력' 재력가 새끼줄로 묶어
강탈로 속여 처벌 피하게 만들어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발굴한 일본 기밀 보고서에는 이능권 의병부대의 군자금 모금 방식이 나온다.

이들은 총기 구매를 위해 강화도 재력가들에게 금품을 요청했고, 재력가는 금품을 마련해 뒀다가 지원했다. 금품을 가지러 갈 땐 재력가를 새끼줄로 묶어 마치 강탈한 것처럼 꾸몄는데, 군자금 제공자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묘수였다고 한다.

군인 출신 김용기, 지홍윤 의병장은 7척의 선단을 구성해 강화도와 인근 섬을 오가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강화 의병의 저항이 얼마나 거셌는지 일본군은 1천238t급 대형 군함과 쾌속 수뢰정 3척을 급파해 의병들의 어선과 나룻배를 공격했다.

이태룡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김용기와 지홍윤 의병부대는 선단을 이끌고 강화도, 석모도, 장봉도, 황해도 연안까지 진출했다"며 "일본이 대형 수뢰정까지 동원해 토벌작전에 나선 것은 한말 의병사에서 유일무이하다"고 말했다.

김용기·지홍윤, 7척 선단으로 투쟁
日 쾌속정 동원 "한말 의병사 유일"
주민 깊은 인상 '만세운동 밑거름'


강화 의병운동은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으로 사라졌으나, 강화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19년 3월 강화 지역의 대대적인 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됐고, 이후 강화도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강화도의 몇몇 의병장은 알려졌지만, 아직 수많은 이름 없는 의병들이 역사 속에 묻혀 있다.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이번 연구를 통해 의병 30명을 발굴했고, 연구를 의뢰한 강화군은 조만간 이들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할 예정이다.

이날 강화군청에서 열린 연구 보고회에 참석한 최용규 인천대 이사장은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는 3년 동안 6차례에 걸쳐 2천828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국가보훈처에 포상을 신청했다"며 "특히 유천호 강화군수가 강화 출신 독립유공자 발굴을 의뢰한 것은 매우 뜻깊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