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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학생들과 대면 못한 시간
끝내 회복할 수 없는 손실로 남을 것
읽은 책의 권수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천천히 읽기 때문이다. 책을 빨리 읽지 않는 까닭은 속독이라는 것이 책 읽는 즐거움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나오는 '제제'와 '뽀르뚜가'의 우정이 얼른 끝나고, 또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나오는 인디언 '리틀 트리'와 '체로키 할아버지'의 사랑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느리게 달려야 매일 달릴 수 있고 매일 달려야 멀리까지 달릴 수 있다'는 말은, 달리기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모름지기 책이야말로 천천히 읽어야 매일 같이 읽을 수 있고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내가 많은 수의 책을 읽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한 번 읽은 책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 경험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한 권의 책을 백 번 읽는 것이 백 권의 책을 한 번씩 읽는 것보다 나았다. 한 권의 책을 여러 차례 읽어서 앞 문장을 읽으면 이어지는 문장이 바로 생각날 즈음이 되면 나는 비로소 책 속의 주인공이 되어 또 다른 삶을 살아보는 즐거움을 누리곤 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행간을 읽기도 하고 단어와 단어 사이의 통로를 따라 가로로 조판된 책을 세로로 읽거나 세로로 조판된 책을 가로로 읽기도 하면서 책 속에 난 길을 여행한다. 때로는 한 칸씩 띄어 읽거나 대각선으로 읽어보기도 한다. 저자가 몰래 넣어둔 암호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얻는 가장 큰 즐거움은 몰입의 즐거움이다. 몽테스키외는 "한 시간의 독서로 이겨내지 못할 걱정거리는 없었다"고 했는데 나도 그랬다. 책의 중독성은 생각보다 강하다. 그리고 그로 인한 위로의 크기는 헤아릴 수 없다.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 패전을 예감한 독일 병사들이 왜 참호 안에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을까? 책은 전쟁의 공포마저도 잊게 해주었던 것이다. 내 경우에는 책을 읽고 있을 때만은 술 생각도 담배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책 읽는 시간 늘어나 위안
책은 힘들때 견디는 든든한 동반자
2년간 국민독서량 안늘어 이유 궁금
독서의 즐거움은 생각보다 크다.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에서 '관심 분야가 많은 사람일수록, 행복해질 기회가 그만큼 많아진다'고 주장했는데, 관심 분야가 많으면 어떤 한 가지를 잃게 된다고 해도 다른 것에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셀은 또 즐거움의 두 가지 예로 축구 관람과 독서를 들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축구 관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축구 관람을 싫어하는 사람에 비해 그만큼 더 즐겁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책 읽기를 싫어하는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즐겁다." 그런데 축구 관람보다 책 읽기가 훨씬 더 즐거운 까닭은 '책을 읽을 기회가 축구를 관람할 기회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긴 그렇다. 글을 읽거나 쓰는 데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즐거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힘든 시기를 보내는 가운데 나 또한 여러모로 전에 없던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2년간 학생과 대면하지 못한 채 보낸 시간은 끝내 회복할 수 없는 손실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난 것만은 한 줄기 위안이었다. 팬데믹의 시대를 견디는 데 책보다 더 든든한 동반자는 없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가 많은 줄 알았는데 지난 2년간 국민 독서량이 늘지 않았다고 하니 그 이유가 참 궁금하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