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이채의 ‘아버지의 눈물’에 나오는 한 구절. ‘오늘이 어제와 같을지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란 희망으로/ 하루를 걸어온 길 끝에서/ 피곤한 밤손님을 비추는 달빛 아래/ 쓴 소주잔을 기울이면/ 소주보다 더 쓴 것이 인생살이더라.’ 국민주 소주(燒酒)의 사회적, 정서적 기능을 제대로 보여준 절창이다.
평안남도 출신 실향민이자 양조업자 장학엽이 1965년 선보인 ‘진로’는 단숨에 국민주 반열에 올랐다. 원래 소주는 맑은 청주를 소줏고리에 담은 뒤 불을 지펴 증발하는 김을 방울방울 모아 만든 증류주이다. 소주 한 병 얻으려 허비하는 쌀이 막대하니 양반들만 즐길 수 있었던 고급 전통주였다. 하지만 밀, 고구마 등 전분을 발효시킨 에틸알코올(주정)에 물을 섞은 희석식 소주가 싼값에 대량공급되면서 소주의 대명사가 됐다.
소주는 전후 최빈국의 국민과 산업화 시대 가난한 노동자의 고된 삶을 지탱해준 감로수였다. 고단한 하루를 불살라(燒) 없애주고 내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채워주었다. 민주화 운동의 동반자이기도, IMF 위로주이기도 했다. 세대 불문하고 소주는 교감과 공감과 영감의 매개이다.
소주의 위상이 이처럼 막강하니 역대 정부는 소주를 서민에게서 빼앗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소줏값은 서민이 감당할 수준에서 관리해왔다. 음주는 흡연만큼이나 건강에 안 좋지만 정부의 음주예방 예산은 금연예산의 1%에도 못미친다는 통계도 있다. 담뱃갑에는 살벌한 금연 캠페인 사진을 강제하는 정부가, 술병에는 고작 연예인 사진 광고를 금지하는 정도에 그친다. 소주 맛 떨어지게 했다간 전국에서 쏟아지는 주당들의 성토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서민들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하이트진로가 23일부터 소주 출고 가격을 7.9% 올린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식당 소주가격이 5천~6천원으로 인상될 것이 분명하단다. 삼겹살, 설렁탕, 햄버거 등등 이미 줄줄이 치솟는 외식 가격에 뒤로 넘어갈 판인 서민들에겐 최후의 일격에 가깝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안도현 ‘퇴근길’) 소주는 한국인에게 인생의 반려주이다. 식당에 ‘소주 6,000’ 가격표가 나붙고 빈 소주병을 헤아리는 스트레스가 현실이 되면,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없는 퇴근길에서 서민들의 분노가 어디를 향할지 궁금하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