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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끝이 언제일지 모를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확산세가 지나면 독감처럼 관리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과 정점에 도달하기까지 위·중증, 사망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측 사이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역대 최대, 폭증, 일일 최다’ 날마다 위기는 갱신된다. 그래서 몇 명이지? 확진환자, 격리자, 사망자 수치의 높고 낮음을 확인하며 불안과 안도 사이를 오간다. 내가 사는 지역 확진환자수를 넣어 재난문자가 온다. 그리고 저녁 6시쯤, 길게 줄이 늘어선 선별진료소 사진과 함께 내일은 또다시 오늘의 숫자를 넘어설 것이라는 위기를 예고하는 기사가 쏟아진다. 확진환자, 사망자 수의 많고 적음은 우리 일상의 불안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아픔과 죽음이 수치화되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 죽음에 대한 추모와 애도에 무감각해져 가고 있다.

우리는 바이러스 위기 앞에서
약자들 죽음에 쉽게 노출
애도 잃어버린 무감각한 사회 경험


2020년 2월19일, 코로나19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청도대남병원 정신병동에서 20년 동안 지내던 정신장애인이었다. 다인실로 이뤄진 폐쇄된 시설을 중심으로 감염이 확산되었고 쇠약해진 몸은 바이러스를 감당하지 못했다. 사망 당시 몸무게는 42㎏에 불과했다. 가로막힌 시설에서 보낸 20년의 삶, 마지막 순간에서야 코로나19 첫 번째 사망자로 세상에 그가 존재했음을 알렸다. 바이러스는 사회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었다. 코로나19 2년 동안 사망자의 많은 수가 장애인, 노인, 기저질환자 등 취약한 조건에 처한 사람들이었다. 시설의 장애인, 요양병원의 노인들 사회에서 잘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코로나19로 사망한 고인을 제대로 추모하고 애도할 시간 역시 부족했다. 임종을 지킬 수도, 곁에 함께할 수도 없었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 손 한번 잡아줄 수 없는 아픔은 남은 가족 구성원들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겨졌다. ○○번 사망자, ○○번 확진자라는 사회적 낙인은 주변에 가족의 죽음을 쉽게 알릴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최근 ‘장례 후 화장하겠다’는 입장이 마련되었지만 여전히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은 작별의 절차를 제대로 밟을 수 없는 비극으로 남아있다. 오미크론이 확산되면서 역학조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확진환자가 나오고 공공의료체계가 손쓸 수 없는 틈에서 사망자가 늘고 있다.

2022년 2월20일 현재 7천405명이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망했지만 비극은 여전히 개인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왜 우리 사회는 함께 아파하고 애도하지 못하는가. 확진자, 사망자로 집계되는 숫자 뒤의 사람의 얼굴을, 살아남기 위해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비극 덮어둔채 일상회복 하는건지
지나온 과정 성찰과 치유 필요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세계 곳곳은 이 아픔을 기억하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80만명이 넘게 사망한 미국은 코로나19 사망자를 기억하며 조기를 게양하고, 조 바이든 대통령은 “치유하기 위해서 반드시 사라져간 사람들의 삶을 기억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독일은 국가 차원의 추모식을 열어 기억하는 것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과정임을 알렸다. 추모와 애도를 통해 서로를 치유하고 재난이 반복되지 않을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 사회는 어떤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바이러스 위기 앞에서 약자들이 죽음에 더 쉽게 노출되고, 추모와 애도를 잃어버린 무감각한 사회를 경험했다. 우리 사회가 겪은 비극을 덮어 둔 채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지나온 과정에 대한 성찰과 치유가 필요하다. 그 출발은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애도하고 추모하는 것이어야 한다. 비극과 절망을 넘어 새로운 내일을 마주할 수 있도록 함께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 우리에게 남은 과제이다.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