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001000692600036222

창신동 낙산공원 산책길

좀 채 곁을 주지 않는 늙은 소나무 뒤편 그늘에

키 작은 노루발 꽃 피었다 //

절벽마을 골목에 서서 두 귀를 쫑긋 세워보면

앞뒷집, 윗집과 아랫집 할 것 없이

잠 없는 노루 잰 발걸음 소리 새벽을 열고 //

패션산업 막다른 마을 배후에

사냥꾼에게 쫓겨 온 보조미싱사가 산다

밑실에 걸어놓은 봉제된 꿈들은

그녀의 지그재그 서툰 발자국만 남기지만

드르륵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조금씩 꽃들은 피어나고

쉬지 않고 내 달리는 노루발이

발꿈치를 올렸다 내렸다 //

올 풀린 꽃밭에 덧단을 대고 밤늦도록 그녀가 박음질되고 있는

지하 네댓 평 라라패션 형광등 불빛이 햇살보다 환하다

김도이 (1954~)


권성훈_교수.jpg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재봉틀 노루발은 천을 박을 때 고정해주는 역할을 하는 부품이다. 노루발 모양을 닮은 재봉틀 노루발은 작은 부자재이지만 다양한 봉제가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것. 서울 창신동 봉제 골목에 가면 노루발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절벽마을 골목에 서서 두 귀를 쫑긋 세워보면' 밤늦도록 노루발과 장단을 맞추면서 일하던 소녀들의 멈추지 않는 꿈의 소리인 것. 아직도 숲으로 돌아갈 시간을 잊은 것처럼. 6월 개화하는 노루발 꽃의 꽃말은 소녀의 기도다. 소녀의 기도가 '앞뒷집, 윗집과 아랫집 할 것 없이/잠 없는 노루 잰 발걸음 소리 새벽을 열고' 아물지 않은 기억의 솔기가 작은 흉터로 봉합되어 있다. 그것은 '지하 네댓 평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노루발 꽃같이 '서툰 발자국'이 '드르륵' 피어올린 꽃이다. 생애 '불빛이 햇살보다 환'한 이유는 '쉬지 않고 내 달리는 노루발' 같은 당신의 삶이 빛보다 빠르게 '박음질' 되고 있기 때문이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