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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사태를 지켜보는 심경이 착잡하다. 국방력을 상실한 채 강대국의 선의와 외교에 운명을 맡긴 약소국의 비애와 수모가 남 일 같지 않아서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이 22일 "우크라이나는 세계 3위 규모의 핵무기를 포기했다"며 "미국이 내놨던 안전 보장을 대가로 핵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안전보장을 약속받고 핵무기를 포기했으니 약속대로 러시아 침공을 막아달라는 요구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졸지에 미·소에 버금가는 핵무장 강국이 됐다. 구 소련이 유럽 최전선인 우크라이나에 1천800여개의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배치해놓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핵무장국 우크라이나가 껄끄러웠던 미국, 영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영토보전과 정치독립을 보장하되 핵무기는 러시아로 넘겨 폐기한다는 '부다페스트 각서'에 서명했다. 우크라이나는 각서 한장에 핵무장을 해제한 셈이다.

하지만 부다페스트 각서는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의 친러 정부가 친서방 시민세력의 봉기로 실각하자, 러시아는 구소련 시절에 우크라이나에 주었던 크림반도를 점령했다. 친러 괴뢰 자치정부를 세우고 무력을 지원하는 방식은 교묘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를 비난했을 뿐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지켜주진 못했다. 다급해진 우크라이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으로 유럽 집단안보에 의지하려 했다. 러시아는 이마저 용납하지 않고 친러계 주민 밀집지역인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을 크림반도와 같은 수법으로 점령하려 한다.

미국은 러시아에 경제제재로 맞서고 강도 높게 비난하고 있지만 무력 개입은 망설인다. 우크라이나 파병을 반대하는 압도적인 여론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이 미국의 약속이행을 읍소하는 배경이다. 우크라이나가 그때 핵무장을 고수했거나, 시간을 두고 폐기했더라면 러시아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미국의 약속 불이행에 애끓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우리도 북한과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하고 비핵화공동선언도 했다. 우리는 1991년 미군 전술핵을 모두 거둬냈고 2022년 북한은 수십기의 핵탄두를 보유한 핵무장국이 됐다. 북한핵과 균형을 맞출 안보 수단 없이 북한과 주변 4강의 선의에 나라의 운명을 맡길 일인지 생각이 깊어진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