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당신과 행복했던 기억부터 불행했던 기억까지 그 모든 기억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그 기억이 없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 무섭습니다."

2019년 방영한 드라마 '눈이 부시게' 속 주인공은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입니다. 삶의 종착역이 가까워 올 즈음, 사라지는 기억이 그에게는 두려움입니다.

치매는 기억·언어·감각 등이 감소하는 질병입니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 원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 뇌 조직이 소실되고 뇌가 위축되면서 기억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대개 치매에 걸린 노인은 기억을 잃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길을 찾지 못하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삶이 끝날 때 '돌아간다'는 말을 쓰는데, 치매는 노인을 마치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갓난아기로 되돌려, 돌아가는 노년의 마지막 모습을 슬프게 만드는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기억 잃고 말 제대로 하지 못해…
노년 슬프게 만드는 치명적 질병
치매 인구 75만명… 유병률 8.4%


2020년 기준 치매 인구는 75만명, 인구 100명당 유병률은 8.4%에 달합니다. 이토록 치명적인 치매는 아주 흔한 질병이 돼 버렸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면 국가가 책임지지 않고는 치매란 병을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개인이 겪는 불행한 질병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문제이기에 그렇습니다. 급속한 고령화로 치매란 그늘이 사회에 드리우자 한국도 '치매국가책임제'를 표방하고 나섰습니다.

본인 뿐 아니라 가족의 삶을 뒤흔드는 치매를 국가가 책임지고 돌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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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아트코리아

정문화(84)씨도 10년 전 아내가 치매 진단을 받은 치매 환우의 가족입니다. 그는 갑자기 주어진 치매환자 보호자 역할로 막막함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정씨는 당시 아내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40년 넘는 세월동안 평탄하게 이어오던 가정생활도 그래서 어렵게만 느껴졌다고 하죠. 그는 부부의 남은 삶을 위해 치매라는 병을 제대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도움을 준 곳이 고양시 일산동구치매안심센터였습니다. 센터의 교육프로그램을 수강하며 치매의 원인과 증상, 돌봄방법 등을 배웠고 교육을 통해 아내에게 나타나는 증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니 자신이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보다 선명해졌다고 합니다.

정씨는 "지금 아내는 자주 보는 사람이 아니면 기억을 잘 못 한다. 어떤 때는 자식들 얼굴도 못 알아볼 때가 있다"며 "지난 10년 동안 치매에 대해 공부하고, 아내를 있는 힘을 다해 돌봐서 그런지 다행히 병의 진행 속도는 느린 편"이라고 설명합니다.

국가책임제 표방에도 보호자 막막
지자체 센터 관리 체계 거점 역할
경기도 '치매파트너' 17만명 활동


제4차(2021~2025년) 치매관리종합계획은 '치매환자와 가족,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치매안심사회 실현'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치매 관리에 지역사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각 지자체에 설치된 치매안심센터는 기본적으로 지역사회 치매관리체계의 거점 역할을 하며 치매환자를 등록해 관리하고, 조기에 치매를 발견할 수 있도록 검진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센터는 또 정씨의 사례처럼 치매전문 교육프로그램을 여는 등 환자 가족들을 지원하는 사업도 병행합니다.

물론 국가 주도로 단기간에 이뤄진 '치매국가책임제'의 여러 사업이 지역사회에 제대로 자리 잡았다고 말할 순 없는 단계입니다.

지난해 12월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치매환자의 지역사회 거주 지원을 위한 정책 토론회에선 지역의 여건에 따라 서비스의 질이 달라지고, 정량 지표 등 실적 위주 평가로 지역 간 불필요한 경쟁이 발생한다는 지적 등이 나오기도 했죠.

경기남부지역에선 매일 치매환자 7명이 집을 찾지 못하고, 길거리를 배회한다고 합니다. 적지 않은 수의 치매환자가 매일 길을 잃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사고를 당하기에 지역사회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치매국가책임제'의 비전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지역사회의 따뜻한 관심은 필수입니다.

치매라는 병을 잘 알지 못하면 관심 자체가 생길 수 없기 때문에 '치매파트너'들이 필요합니다. 경기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치매파트너는 모두 17만7천801명으로, 초등학생 이상이라면 누구나 30분짜리 온라인 교육 영상을 시청하면 치매환자의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치매파트너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치매환자와 가족들이 바라는 점도 결국 지역사회의 열린 마음입니다.

박미자 고양시 일산동구치매안심센터 간호사는 "치매환자와 가족이 지역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향으로 치매파트너, 치매안심마을, 선도교육 등이 이뤄졌지만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사업 대부분이 중단된 상황이라 안타까운 마음"이라며 "치매에 대한 인식 역시 아직 낮은 편이지만 과거와 비교해 나아지고 있는 만큼 지역사회 모두가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주인공으로 치매 환자로 분한 김혜자 배우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읊었습니다. 치매 환자가 말하는 삶의 찬가이자 우리가 치매 환자를 이해해야 할 이유가 모두 이 대사 속에 담겨 있습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콤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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