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실 학계에서는 민족 단위를 강조하는 논의가 대체로 고리타분하게 취급되는 형편이라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풍토가 설득력을 가지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정불변하는 민족 원형을 설정하고, 그 틀로 국민의식을 함양하려는 국가 기획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가령 '단군의 자손'이라는 혈연에 기반을 둔 단일민족 신화는 해외에서 국내로 이주한 이들과의 공존 가능성을 봉쇄하고 만다. 사실 여부도 들어맞지 않는다. 원주 원, 장흥 위, 남양 홍, 남양 방, 남양 서, 진주 형, 온방 방, 초계 변, 김포 공, 남양 제갈, 평택 임, 행주 은, 효령 사공, 남양 송, 옥천 육, 의령 옥, 해평 길, 남양 전씨 들은 당에서 귀화한 이의 후예가 아닌가. 1990년대 이후 학계에서 민족 신화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확산된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탈근대 지향 위해 근대의 공과 심문
당연히 진행되고 근대사상·체제의
큰 축 민족 문제도 다뤄 질 수 밖에
그렇지만 민족 단위를 마냥 부정하는 것이 능사일 수는 없다. 학계에서 민족 단위를 부정하는 논거로 강력하게 활용되고 있는 것이 '민족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관점이다. 유럽의 경우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하여 엉성하게나마 국민국가와 국경선이 확립되었으니 그렇게 판단할 법도 하다.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그보다 앞서서 민족의식이 구축되고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몽골의 주변국 침략이 계기였다. 고려 충렬왕 때 일연(1206~89)은 왜 '단군 신화'로 시작되는 '삼국유사'를 지었던가. 신라계와 고구려계의 갈등을 넘어서서 동일한 기원으로서의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외부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고려 이후 들어선 왕조가 기자조선을 잇는다는 맥락에서 국호를 '조선'이라 정했던 데서도 민족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이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거나, 1443년 현재의 국경을 확정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당시 근대 번역어로서의 '민족'이라는 단어가 없었으니 그에 근사한 의식까지 있었을 리 만무하다는 속단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제국의 민족주의와 식민지의 민족주의를 거울의 대칭인 양 동등하게 설정하는 관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번 사건의 초점은 약소국 우크라이나의 자주권을 러시아가 무력으로 짓밟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저항이 과연 똑같이 비난받아야 할 폭력일까. 나라가 없는 탓에 오랜 기간 고생했던 유대인의 사례를 꼽아 민족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무자비하게 억누르고 있다는 것. 유대인의 사례가 '저항적 민족주의'와 '약탈적 민족주의'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나, 이를 민족국가가 노정하는 단 하나의 확정된 경로로 단정해야 할 까닭은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화이부동에 입각하여 국제 질서를 모색하는 지적인 전통이 이어져 왔다. 민족국가로서 자주권을 지키되 다른 민족국가와 공존하는 방법을 마련하고자 면면히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은 그와 같은 노력의 계승이지 '민족=악'이라고 성급하게 딱지 붙이는 일이 아닐 터이다.
민족의식 해체 방향 과연 타당할까
현실성 없고 자칫 위험 초래할 수도
탈근대 지향을 위하여 근대의 공과에 대한 심문은 당연히 진행되어야 한다. 근대사상 및 근대체제의 큰 축을 차지하는 민족 문제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족·민족의식의 해체로 나아가려는 방향 설정이 과연 타당할까. 우크라이나의 현실을 무겁게 지켜보는 나는 그와 같은 시도들이 현실성 없을뿐더러 자칫 위험을 초래하기 십상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