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과테말라 대선에서 코미디언 출신 지미 모랄레스가 당선됐다. '나는 부패하지도 않았고, 도둑도 아니다'란 구호로 결선에서 70% 넘게 득표했다. 중남미 주변국들과 판박이로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에서 청렴을 외친 정치신인이 반사이익을 본 것이다. 정치를 희화화한다는 비난에, 국정 운영 능력에 대한 의구심은 시궁창 정치에 대한 혐오에 가렸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실정이 거듭되면서 교사들에게 GPS를 의무 착용하게 한다는 등 비현실적인 선거공약이 뒤늦게 소환됐다. '대통령이 장난이냐'는 비웃음과 함께. 중도층 지지를 기반으로 집권하고도, 우익 행보로 돌아서 비판을 받았다. 성범죄 연루 의혹까지 제기돼 치명상을 입었고, 2019년 대선에서 재선에 실패했다. 코미디언의 정치 실험은 끝내 웃지 못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미사일 공격을 받은 수도 키예프는 참혹하다. 폭격당한 건물 밖에서 여성이 피를 흘리며 절규하는 모습이 생중계됐다. 지하 방공호로 피신한 시민들은 공포에 떨며 포성에 귀를 막았다. 밤하늘을 가르는 미사일 궤적과 폭음에 우크라이나 전역이 흔들린다.
침공에 맞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내겐 도망칠 수단이 아닌 총알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이 도피처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전하자 항전 의지를 밝혔다. 25일에는 데니스 슈미갈 총리 등과 함께 영상을 찍어 "우리 모두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지켜내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우리는 우리의 영토와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고 있다. 우크라이나로 돌아올 수 있는 이들은 모두 돌아와 달라"고 독려했다.
대통령이 결사 항전을 외치자 시민들은 소총과 화염병을 들었고, 재외국민은 속속 고국으로 향하고 있다. 비무장 시민은 질주하는 탱크를 몸으로 막아냈다. 서방세계는 물론 아프리카 국가들까지 우크라이나 편을 든다. 코미디언 경력 대통령에 대한 부정 평가는 '나라를 구할 영웅'으로 급치환되는 양상이다.
국민 저항에 직면한 러시아군과 푸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사태 장기화는 베트남전 미군과 다를 게 없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가니 전 대통령은 미군이 철수하자 야반도주했고, 탈레반은 수도 카불에 무혈입성했다. 웃음기를 걷어낸 코미디언 대통령이 국가지도자는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