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쭉꽃 딸기꽃이 초원에 피면은 / 타네요 수원처녀 가슴이 타네요.'
가수 이미자의 '수원처녀'는 1972년 수원시가 시 노래를 공모했을 때 당선된 곡이다. 노래 첫 소절부터 딸기꽃이 등장한다. 당시 수원이 딸기의 도시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낸 '한국의식주생활사전'에선 딸기에 대해 "1960년대에는 서울의 한남동, 불광동, 구파발, 태릉과 경기도 수원 딸기가 유명했다. 국산 품종은 1965년 최초로 '대학1호'가 수원에서 재배됐다" "딸기철이면 딸기밭으로 나들이 가던 '딸기놀이' 풍속은 1960~1970년대에 수원의 푸른지대 같은 딸기밭에서 성행했다. 딸기요리강습회가 열리거나 대학생들의 딸기밭 미팅인 '딸기팅'도 이뤄지고, 주말 레저 붐이 될 정도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1960~1970년대 요리강습회 등 열려
푸른지대만 21만여㎡ 이르러 '성황'
'외래객 15만명' 경인일보 보도도
2012년 수원문화원이 펴낸 책 '수원을 아시나요'는 당시 딸기 농사가 성행했던 수원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당시 수원이 '딸기의 도시'가 된 것은 서울대 농과대학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낸 딸기 품종인 '대학1호'의 영향이 컸다.
'수원을 아시나요'에 따르면 당시 서둔동 일원 푸른지대 밭의 주인이었던 박철준씨는 대학1호 품종을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후 딸기 농사가 확대되면서 당시 푸른지대 딸기 밭만 21만여㎡에 이를 정도였다. 노송지대와 매탄동, 원천동 등을 넘어 안양까지 딸기 농사가 뻗어 나갔다.
지금은 딸기가 겨울 과일이 됐지만, '대학1호'는 5월 중순쯤 출하됐다. 5~6월에는 딸기를 맛보기 위해 주말마다 수원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뤘다.
데이트 장소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1967년 경인일보(당시 인천신문)는 '작년도에 딸기를 즐기려고 찾아온 외래객이 15만명 정도였고, 딸기와 포도의 매상고도 489만원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그러다 1980년대 비닐하우스 보급이 증가하면서 딸기는 시설재배로 전환됐다. 생산지가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도 이때부터다. 수원 딸기의 명성도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하우스용으로 우수 국산 품종이 다수 개발되면서 딸기 시장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 대학1호도, 한때 딸기의 고장이었던 수원도 잊혔다.
박영재 대표, 뿌리 구해 10년 재배
다만 대학1호의 꽃은 아직 저물지 않았다. 국산 종자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오랜 기간 뛰어온 박영재 수원씨앗도서관 대표는 첫 국산 딸기 품종인 대학1호의 역사성과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 장기간 수소문해 부산의 한 딸기 연구소에서 대학1호 뿌리를 구해 10년 넘게 기르고 분양하고 있다.
지금 딸기에 비해 당도는 적고 산미가 있지만, 향이 워낙 좋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박 대표는 "10년 동안 계속 키우고 있다. 뿌리를 나눠드리기도 했다. 딸기를 수확해, 예전에 푸른지대에서 살던 분들에게 맛을 보여드렸더니 '옛날 그 딸기 맛'이라고 하더라. 어떤 분은 눈물도 흘리시더라"라고 말했다.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