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탈피'의 무대는 실내 동물원이다. 이 작품은 운영이 어려워 매각이 임박한 동물원에서 주인공 소진과 알비노 버마 비단구렁이 사이의 소통과 교감을 다루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도 힘겨워진 우리 시대에 사람과 뱀 사이의 소통과 교감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제 퇴물이 된 비단구렁이가 탈피를 멈춘 상황에서 연극은 시작한다. 실내 동물원 전시관에 갇힌 채 죽어가는 동물을 바라보는 소진의 시선은 점차 사람에게로 옮겨간다. 탈피를 멈춘 비단구렁이를 바라보는 염려의 시선이 우리 사회에서 약자로 내몰린 사람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까지 그 시선이 점차 이동하는 과정에서 소진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동물원이라는 비유가 가리키는 곳에는 인간중심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자연의 착취를 통해 이룩한 근대의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이 동물원인 것이다. 그 공간에 전시된 동물은 생명체로 여겨지지 않고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전시물로 취급받는다.
스스로 윤리감각 돌아보게 할 것인지
인간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채
폭력 세계에 속할 것인지 묻는 것
우리 사회에서 동물원 옆에 놓일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는 공장식 축산의 공간이다. 축산 동물에게 가해지는 품종 개변에서부터 절대적으로 열악한 사육 시설에 이르기까지 축산의 공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공간이다. 부리 절단의 신체 손상과 섭식량을 늘리기 위한 조명 시설 등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단지 인간중심주의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맹목의 폭력적 눈감음이 있을 뿐이다.
이제 동물원이나 축산의 공간을 조금 더 확장해보자. 이주노동자의 주거 공간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만나게 된다. 이주노동자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주거권이 얼마나 열악한지에 대한 보고서는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현재의 고용허가제 아래에서는 좀처럼 개선될 것 같지가 않다.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아닌 불법체류자로 호명하는 현재의 시스템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생명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전락한 생산기계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시선으로는 주거 공간에 반드시 독서등이 있어야 한다고 규칙을 정한 다른 사회가 보일 리 없다. 부품이 어찌 책을 읽는다는 말인가.
"저는 한국에서 유령으로 지내온 거나 마찬가지에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미등록 이주아동인 마리나의 말이다. 미등록 이주아동인 페버는 이렇게 말한다. "왜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으냐고 묻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이 질문을 한 사람에게 그대로 되돌려 주고 싶어요. 그럼 왜 당신은 한국에 살고 계시나요? 똑 같아요. 저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사는 거죠." 한국으로 이주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마리나와 페버가 받아야 했던 차별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연극 '탈피'는 비단구렁이가
우리 사회로 기어 나오게 한 작품
공감이 윤리의 출발이라면, 타자에 대한 동정 어린 연민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인정으로 이어지는 연대의 공감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연극 '탈피'는 묻고 있다. 그 인정의 대상으로 어떤 동물은 포함하고 어떤 동물은 배제할지, 누구는 포함하고 누구는 배제할지를 묻는 것이다. 포함과 배제를 결정하는 그 경계선 앞에서 관객은 불편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관객 스스로의 윤리 감각을 밝히지 않고는 도저히 그 경계선을 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을 구입하러 동물원에 찾아온 사람에게 "뱀은 어떠세요?"라고 묻는 마지막 장면은 그러므로 취향을 묻는 게 아니다. 그 불편한 물음을 눈치 채고 스스로의 윤리 감각을 돌아보는 편에 속할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채로 그 원심력의 폭력이 작동하는 세계에 속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연극 '탈피'는 비단구렁이가 전시관을 넘어, 동물원을 넘어 우리 사회로 기어 나오게 한 작품이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