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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수 노무사
공인노무사로 일하면서 노동법과 노동정책에 대한 세간의 인식에 이따금 깜짝 놀란다. 전문가와 일반 대중의 인식차가 여실하게 느껴지는 분야는 단연 산업재해보상보험(산재)이다. 2022년 현재도 많은 노동자가 산재를 회사에 빚지거나 싸움을 거는 일, 동료들에게 미안한 이기적인 일로 생각하고는 한다. 더러는 회사가 먼저 그런 선입견을 품고 부담을 준다.

몇 개월 전 한 의뢰인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암에 걸려 회사를 사직한 뒤 산재를 신청하게 됐는데,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해야 할 서류를 발급받으러 회사에 다시 방문해야 했다. 그런데 산재 때문에 회사에 가면 동료들 보기 미안해서 못 하겠다고 망설이시는 거다.

일 때문에 아파서 산재를 신청하는 게 회사나 옛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죄스러운 일은 절대로 아니다. 회사에서 꼭 서류를 받아야 하고, 산재가 절대 민망하거나 나쁜 행동이 아니라는 점을 그분께 설득하기 위해 꽤 오래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 필요한 서류를 다 내고 나니 막상 산재 인정까지 걸린 기간은 생각보다 빨랐다. 이견의 여지 없이 확실한 '업무상질병'이었기 때문이다. 


'동료에 미안하고'·'그렇게까지'…
혜택 좋은 쿠폰 안 쓰는것 같아 답답


상담자뿐만 아니라 주변에 일하다 다친 사람, 병든 사람 얘기를 들으면 산재를 신청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하는 편이다. 가히 '산재 전도사'다. 막상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퇴근하다 얼음판에 넘어져 다쳤는데도 자비로 치료하고 소중한 연차휴가를 쓴다. 왜 산재를 안 하느냐고 물어보면 "뭘 그렇게까지"라고 한다. 상사의 막말과 괴롭힘 때문에 반년 넘게 무급휴직하면서도 '산재까지는' 엄두를 못 내겠다고 한다.

이들에게 도대체 산재가 뭐길래 '미안하고' '그렇게까지'인 걸까. 간단한 부상은 대리인 없이 혼자도 신청할 수 있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승인받으면 치료비에 휴업수당도 받을 수 있는데. 마치 혜택 좋은 쿠폰이 있는데 사람들이 몰라서 안 쓰는 것 같은 답답함마저 느낄 때도 있다.

노동자든 회사든 산재에 대해 품고 있는 불안은 막연하다. 회사에 피해가 갈 것 같아서, 보험료가 오를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그냥 좀 그래서…. 잘 몰라서 더 두려운 걸지도 모른다.

산재상담에서 가장 자주 하는 말은 "회사의 허가를 받을 필요는 없어요"이다. 노무사한테는 너무 당연한 사실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회사가 허락하지 않으면 산재를 신청하거나 인정받기 어렵다고 오해한다. 사고든 질병이든 산재 신청은 재해가 발생한 사람(노동자)의 선택과 의사에 달렸다. 회사가 근로복지공단에 부정적 의견을 전달할 순 있지만, 그것이 결과를 좌우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객관적 사정이 있는데도 오로지 사업주 의견 때문에 불인정된다면 명백히 잘못된 판정이므로 소송감이다.

사고든 질병이든 신청 노동자 선택
회사가 내는 산재보험료 영향 안줘
당당하게 청구하는 사회가 됐으면


보험료율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 업무상 질병과 출퇴근 재해는 회사가 내는 산재보험료에 영향을 주지 않고, 업무상 사고도 몇 년 동안 한 자릿수 정도라면 유의미한 변동은 없다고 봐도 된다. 언젠가 돌려받기 위해 모든 사업장이 다달이 큰 보험료를 내는 것이니 산재인데도 보상을 안 받으면 오히려 손해다.

물론 한 사업장에서 사고를 당한 재해자가 너무 많거나, 최근 시행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적용되는 사망사고 등이 발생한다면 보험료든 처벌이든 사업주가 져야 할 부담은 커진다. 이는 사고에 책임 있는 자가 마땅한 의무를 지는 것일 뿐, 불의의 재해를 당한 노동자가 미안해하고 움츠러들 이유는 되지 않는다.

결국 이 또한 노무사의 역할이겠거니 한다. 내게 대리를 맡기는 의뢰인이 아니라 해도 일하다 다치고 병이 들면 기꺼이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산재를 신청하는 게 당연해지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산재는 4일 이상의 치료가 필요한 경우면 가벼운 부상도 얼마든지 신청할 수 있다. 회사도 매달 내는 보험료가 아깝지 않게 오해를 거두고 산재를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줬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 잘 아는 사람들이 자주, 쉽게, 널리 얘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지치지 않고 말하려 한다. "산재 신청하세요, 얼마든지!"

/유은수 노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