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전투표장을 찾은 확진·격리자 투표지는 소쿠리, 라면 상자, 비닐쇼핑백에 던져졌다. 유권자가 자신의 투표지가 어떻게 투표함으로 전달되는지 알 수 없는 황당한 일이 반복됐다. 특정 후보에 날인된 투표지를 받아든 유권자는 묻고 따지다 '난동을 멈추라'는 꾸짖음을 들었다. 선거 전, '소쿠리 투표'는 직접·비밀투표 원칙에 위반된다는 내부 의견은 무시됐다.
제주와 부천선관위에선 사전투표함과 투표지 뭉치가 사무국장실에서 발견됐다. 투표함을 지켜야 할 CCTV는 신문지로 가려졌다. 명백한 상시 감시규정 위반 행위다. 서울서 사전투표한 유권자가 투표일 춘천에서 다시 투표지를 받는 놀라운 일도 발생했다.
거리 현수막에 '살아있는 소가죽을 벗기는 세력'이란 저속한 표현이 등장했다. 2년 전 총선에서 '내로남불'이 특정 정당을 떠올리게 한다며 불허 처분한 선관위가 표현의 자유 운운하며 얼굴을 바꾼 것이다. 상대가 '쌍욕, 불륜 심판하자', '전과 4범은 안됩니다'로 대응하면서 흙탕물이 됐다.
사전투표 부실관리로 중앙선관위 우환 심각
여당, 지선 혼란 예방 선관위원장 유임 주장
선거 내내 이해 불가한 사고가 속출하면서 투표관리 수준이 수십 년 전으로 후퇴했다는 개탄들을 한다. 심판이 한쪽 편을 거드는 것도 모자라 선수로 나서려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소셜네트워크와 사내 게시판에 비판 글이 올라오자 비아냥과 조롱으로 응수했다. 무능과 무책임에, 정치 편향적이고 오만하다는 비난들을 한다. '선관위가 이래도 되느냐'고.
사전투표 혼란으로 촉발된 선관위의 우환(憂患)이 심각하다. 전국 선거사무를 총괄한 중앙선관위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은 자리를 비웠다. 두 사람은 현 정부에서 발탁인사를 통해 중용된 인사들이다. 지자체에 근무하다 선관위에 특채돼 6개월 만에 승진한 아들을 둔 총장은 언론보도 다음 날 사직했다. 불과 4년 사이 직급이 세 단계 점프한 경이로운 주인공이다. 야당에선 사직 처리를 미루고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노정희 중앙선관위원장은 탄핵을 받을지 모른다. 사퇴 압력을 받자 아랫사람에게 사전투표 혼란에 대한 책임을 떠넘겼다. 선거실장과 국장이 물갈이 대상이 됐다. "앞으로 더 잘하겠다"며 지방선거 TF(태스크포스) 팀장을 지명했다. 부실 선거 논란에도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그림자 인물'이란 평이다. 선거 수장이 수하들을 희생양 삼아 자리보전에 나섰다고 수군댄다. 야당은 탄핵 카드를 꺼내려 한다.
선관위원장을 호위하는 여당의 속내는 탐구영역이다. 6·1 지방선거의 혼란을 막으려면 유임돼야 한다고 방어막을 친다. 사전투표소마다 시비에 항의가 빗발쳐도 휴일 출근은 '노'라는 사람에게 계속 지휘봉을 맡기겠다고 한다. 내 편이라면 감싸고 보는 진보진영의 고질(痼疾)은 불치병이 된 지 오래다.
공자왈 '허물 알고 안 고치면 그게 곧 허물'
잘못 알고도 놔둔다면 '고의'라고 의심 받아
과이불개(過而不改)란 말이 있다. '허물을 알고서 고치지 않는다면 그게 곧 허물'이라는 공자 말씀이다. 허물을 만드는 건 무능해서다. 자신이 무능한지 알면 고치고, 나아지려 노력해야 한다. 잘못이 뭔지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다면 업을 쌓는 짓이다. 잘못을 알면서도 아무 일 아닌 듯 그냥 놔둔다면 고의로 그런다는 의심을 받는다. 선관위 사정이 이와 다르지 않다.
헌법기관인 선관위 직원들은 신분과 임기를 보장받는다. 엄정한 선거관리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가치를 지켜내라는 소임을 명받았다. 그런데 지난 총선과 대선을 치르면서 공정성을 의심받고, 무능한 집단이 됐다. 중앙선관위원장 사퇴를 넘어 부실관리와 부정투표 의혹은 실체가 명확하게 규명돼야 한다. 중대과실이 있었다면 경중을 가려 처벌해야 한다. 70여 일 앞둔 6월 전국지방선거를 위해서도 무기력한 조직을 다시 추슬러야 한다. 모르고 하면 허물(過)이나, 나쁜 줄 알고 하면 악(惡)이 된다. 악이 반복되면 죄(罪)가 된다. 허물을 알았다면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