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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 채널을 돌릴 때마다 어김없이 멈추는 재방송이 있다. 지난 17일 방송된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이다. 지난달 26일 타계한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의 마지막 2년을 기록한 영상은 그가 없는 세상에 남겨진 한국인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첫 방송을 끝까지 시청했다. 죽음을 앞둔 이어령의 말의 무게는 천근만근이다. 되새김질할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확장되니 재방에 열중한다.

그제 재방에선 '뜨다'와 '날다'의 차이에 꽂혔다. 이어령은 대한민국이 국민소득 80달러의 나라에서 지금의 경제대국으로 떴지만 지금은 날지 못하는 신세라고 개탄한다. 뜨는 것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바람만으로 가능하지만, 자기 의지대로 날려면 엔진과 날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선진국 수준으로 떴지만, 내부 갈등으로 동력을 상실해 날지 못한 채 바람 따라 활공 중인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이어령은 "얼마나 많은 천리마, 아인슈타인, 셰익스피어들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라졌겠느냐"며 백락의 안목을 가진 지도자의 부재를 한탄했다. 할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손자를 이기는 세대 역살(逆殺)을 우려했다. "윗세대가 이기고 젊은 세대가 설 자리가 없다면 내일의 한국은 사망"이라고 선고했다. '말 탄 사람'(대륙세력)과 '배 탄 사람'(해양세력)을 포용할 수 있는 반도성(半島性)도 강조했다. 반도성을 '가위바위보'에 빗대 강자도 약자도 없는 삼항순환의 정신이라 설명했다.

이어령의 어록은 다큐멘터리를 위해 새롭게 창작된 말이 아니다. 생전에 남긴 저서와 강연을 통해 익숙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자의 위엄으로 의미가 깊어졌다. 떴지만 날지 못하는 대한민국에게 남긴 '비단 주머니' 같다. 그는 "사상의 알, 생각의 씨를 남기고 싶다"며 다큐멘터리 제작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그의 바람은 적중했다.

지금 이 시각 청와대 권력과 인수위 권력이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두고 충돌하고 있다. 내려올 권력과 올라갈 권력이 "수고했다", "수고해라" 덕담 대신 악담을 나눈다. 이런 정치로는 대한민국이 날 수 없다.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인, 정치하겠다는 사람들이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을 시청해보길 권한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