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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오래 전 미국 일리노이 대학 언어학과 김진우 교수의 인터뷰를 접한 적이 있다. 언어학에 대한 소양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나는 그의 인터뷰를 통해 언어에 대한 이해의 폭을 한층 넓힐 수 있었다. 인터뷰 중에서 내가 인상 깊게 들었던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비 오는 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중요한 서류를 학교에 놓고 온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학교로 가야 하는데 교통편이 없어서 남의 차를 빌려 타야 했어요. 길가에서 지나가는 차를 잡는데 때마침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어요. 천둥 번개가 치고 세찬 빗줄기가 쏟아져서 아주 곤란했는데 운 좋게도 제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멈추었습니다. 그래서 조수석에 타고 차 문을 닫았는데 차 안에는 바깥과는 달리 정적이 흐르더군요. 운전하던 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자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더군요. '날씨가 조금 궂죠?'
 

학교에서 서류를 가지고 다시 집으로 오기 위해 또 길가에서 차를 잡아야 했습니다. 비는 여전히 억수 같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커다란 트럭 한 대가 제 앞에 멈추었습니다. 트럭에 올라탔는데 트럭 운전수가 제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 빌어먹을 비 좀 봐!' 제가 점잖게 표현해서 그렇지 실은 욕설이 섞여 있었어요.

퍼붓는 비는 승용차 운전자에게나 트럭 운전수에게나 똑같이 내렸는데도 승용차 운전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점잖게, 트럭 운전수는 큰 소리로 거칠게 말한 것이지요. 그래서 흔히 승용차 운전자의 말은 고급언어고 트럭운전수의 말은 저급하다고 여기기 십상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승용차 운전자는 환경이 조용하니까 조용히 말해도 자신의 말이 전달됩니다. 그러니 소리 지를 필요가 없는 겁니다. 반면 트럭 운전수는 주변 환경이 시끄러우니까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자신의 말이 전달되지 않아요. 그래서 큰 소리로 거칠게 말하는 것일 뿐 그의 언어가 결코 승용차 운전자의 언어보다 저급하다 할 수 없어요." 

 

30년은 족히 지난 일이라 표현까지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김진우 교수의 이야기는 그동안 고급언어와 하급언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언어가 곧 인격을 반영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언어관이 근본적으로 틀렸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권력 획득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
점잖은 언어로는 자신 정당한 권리
보장 받을 수 없기에 거친말로 외쳐
그 사람들 인격 문제 있는게 아니라
외침 귀 기울이지않는 세상이 문제

김진우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언어는 발화자의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것이 의미의 차이나 우열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며 각자의 고유한 언어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거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인격이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그릇된 생각일 것이다. 

 

언어가 달라지는 원인은 비단 물리적인 환경의 차이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조용히 말을 해도 사람들이 경청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잘 듣지 않는다. 언어 또한 권력을 반영하기에 발화자가 가진 권력의 차이에 따라 말의 전달력에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을 획득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은 점잖고 세련된 언어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때로 온몸에 쇠사슬을 감거나 굴뚝 위에 올라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거친 말로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친 말을 하는 사람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정당한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세상에 분노한 약자들의 외침을 거칠다고 지적하는 사람의 말 속에는 세련된 인격이 들어있는가.

김진우 교수의 인터뷰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점은 그가 인터뷰 내내 영어를 단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어가 권력이었던 시절에 미국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이가 한국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영어를 단 한 마디도 쓰지 않았다는 데서 나는 그가 언어학자다운 언어를 구사했다고 생각한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