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 문을 닫으려 하나?"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격하게 분노했다. 지난 6일 유엔본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화상 특별연설을 하면서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부차에서 300명 넘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러도 국제사회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국제법이 통용되는 시대는 끝났느냐"며 "행동에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연설 중간 방영된 90초 분량의 동영상은 참혹했다. 어린이와 여성 등 민간인 희생자 시신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성폭행을 당했거나 살해 여성의 몸에 나치 문양을 새기는 반인륜 행위가 폭로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절규하는데도 각국 외교관들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탄식을 내뱉었을 뿐이다.
유엔은 지구촌의 분쟁과 갈등을 조정하거나 중재할 자격을 잃은 지 오래다. 한때 중동 등지 화약고에 뛰어들어 대화와 타협을 이끌어 내기도 했으나 그뿐이었다. 지난해 초 미얀마에서 발생한 군부 쿠데타 사태는 유엔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여실히 보여줬다. 민주 시민에 대한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살상이 자행됐으나 방관자 입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안보리 결의는 중국 반대에 틀어막혔다. 국제사회 비난에도 유엔은 귀를 막고, 고개를 돌렸다.
유엔은 회원국 간 힘의 불균형을 노골적으로 인정하는 구조다. 핵심 의결기구인 안전보장이사회는 5개 상임이사국 전체가 동의해야 권한행사가 가능하다. 군사조치에 합의해도 특정 상임이사국이 반대하면 효력이 없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로 구성된 '깡패 카르텔'이다. 10개 비상임이사국은 들러리일 뿐이고, 총회 의결은 구속력이 없다. 유엔이 국제 평화와 안전을 지키겠다는 설립 목적을 달성하려면 안보리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들을 한다. 안보리 의결 사항인데, 상임이사국들이 응할 리 없다. 무력한 유엔은 괜찮으나, 영향력을 잃는 건 용인할 수 없다는 심보들이다.
젤렌스키는 이날 "우리는 안보리 거부권(veto)을 '살인의 권리'로 바꿔 사용하는 나라를 상대하고 있다"며 러시아의 상임이사국 퇴출을 요구했다. 주유엔 러시아 대사는 민간인 학살은 조작이라고 했고, 중국 대사는 검증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대사는 침통한 표정 연기를 했다. 국제사회가 유엔의 존재 이유를 묻고 있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