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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운전이 싫어 지갑 속에만 고이 간직하던 면허증이 빛을 본 건 아이가 태어난 이후였다. 기저귀, 간식통을 바리바리 싸들고, 유아차까지 짊어지고 버스, 지하철을 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작은 턱도 쉽사리 넘기 어려웠고 계단을 마주치게 되면 엘리베이터나 경사로를 찾아 오랜 시간을 빙빙 돌아야 했다. 유아차와 동반하여 버스를 타는 것은 혼자 이용할 때보다 몇 배의 시간이 더 드는 일이었다. 잘못한 일이 아님에도 함께 탄 승객들에게 괜시리 고개 숙여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게 되었다. '조금 더 편하게 탈 수 있도록,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면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을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유아차를 이용하며 바라 본 세상은 계단 앞에 머뭇거리게 되고, 작은 턱을 넘는 게 전혀 사소하지 않은, 일상이 난관인 곳이었다. 


'나중에·시기상조' 반복하며
법 제정 여전히 국회 문턱 못 넘어


이동이 자유로운, 건강한,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 어린이 등 교통약자들은 이동이 쉽지 않은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제도와 사회적인 인식 변화가 계속되고 있다. '이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지만 교육, 노동, 여가 등 세상과 만나고 사회에 접근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은 이동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점차적으로 저상버스를 도입하고, 장애인 콜택시 등 특별교통수단 관련 예산 지원 등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는 너무도 더디다. 여전히 저상버스 도입률은 30%도 안되고,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는 저상버스 도입에서 제외된 상태이다. 특별교통수단 관련 예산 지원 조항도 의무가 아닌 임의조항이었다. 

 

장애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알리고, 장애인권리예산을 확보하고자 출근길 지하철을 타기 시작했다.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 회장은 지하철에 오를 때마다 맨 처음 하는 말이 "시민 여러분, 불편을 끼쳐 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한다. 항상 무엇이 미안한지, 무엇이 죄송한지, 입에 껌딱지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는 것. 오히려 너무 사소해 특별하다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꿈 같은 일이었다. 미안하고 죄송해야 할 사람은 장애인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거리로 나올 수 없게 만들어진 세상과 장애인들이 차별받는 현실을 외면한 채 살아온 이 사회가 해야 할 말이었다.

누군가 차별받고 있다면 일상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다면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국민의 힘 대표 이준석은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 부조리', '비문명적 관점으로 불법 시위'라며 장애인들의 투쟁이 문제라 지적하고 있다. 장애인들이 싸우는 이유, 요구, 사회적 맥락은 사라진 채 차별과 혐오만 부각되는 상황이다. 이준석 대표의 발언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 행위가 인권침해가 아니라 논쟁이 필요한 문제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입장에서 제도를 정비해야 할 정치인이 오히려 그 권리와 인권을 후퇴 시키고 있는 것이다.

차별이 문제라면 차별없는 세상
만들면 간단한 일인데
그 사실을 정치인들만 몰라

편을 가르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정당이 권력을 잡으며 혐오와 배제의 정치가 노골적으로 힘을 얻고 있다. 차별과 혐오를 규제할 차별금지법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은 나중에, 시기상조를 반복하며 여전히 국회 문턱 앞에 멈춰있다. 국민의 힘 이준석 대표의 혐오 표현에 반발하며 몇몇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휠체어를 타고 국회에 출근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현실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 장애인들이 차별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일이다. 4월 11일 미류, 종걸 두 인권활동가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한다. 정쟁에 몰두한 사이 시민들이 나서고 있다. 차별이 문제라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면 될 일이다. 그 간단한 사실을 정치인들만 모르고 있다.

/안은정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