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 선생은 함경도 북청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라고 젊은 시절을 제주에서 보냈다. 40대 중반에 인천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인천시민으로 살았다. 시민으로서 선생은 각종 사회운동에도 관여하셨고 미술작가로서 인천 문화예술계의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민주화 투쟁과 인천대학교 시립화에 주도적으로 나섰던 한 선배는 그 시절 강광 교수가 없었다면 인천의 시민운동이 얼마나 쓸쓸했을까 회고하며 선생의 타계를 안타까워했다.
민중미술 1세대로 인천 문화예술계 버팀목
제주에서 초대전 기획했듯 인천도 움직여야
인천연구원에 다니던 시절 어떤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일을 맡고 있던 내게 강광 교수가 직접 찾아왔었다. 그때 선생께서 인천은 평화를 안고 가야 하는 도시이니 문화행사의 핵심 주제로 반드시 평화를 내세워 달라고 요청했었다. 말씀이 많지 않고 늘 사람 좋은 웃음만 짓던 분께서 그때만큼은 형형한 눈빛으로 얘기하시던 장면이 생생하다.
지금 같은 봄날이었을 것이다. 재단 대표이사로 근무하실 때 이따금 인천아트플랫폼 앞마당 벤치에 걸터앉아 선생은 지나가는 사람들, 자동차들을 지그시 바라보곤 했었다. 반대쪽 창가에서 나는 그런 선생을 관찰하고는 미술가가 자연을, 도시의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었다. 대표이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작가로 흘러가는 시간을 그렇게 포착하고 관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럴 때마다 저분께서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라는 어색한 옷을 입고 붓을 던져둔 채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늘 죄송스러웠었다.
개인의 삶 왜 조명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일
과거 되새김 도시 한단계 성숙해지는 과정
이제 선생이 떠나고 허허로운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우리에게 작지 않은 과제가 놓여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다. 제주에서 작가 강광의 초대전을 기획했듯 인천은 인천시민 강광, 미술작가 강광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천이라는 도시는 앞으로 강광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건 비단 선생에게만 국한된 말은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온 인생의 깊이와 넓이만큼 기억된다. 가족과 지인들에게만 기억될 인생도 있고 공동체에게 기억될 인생도 있다. 그 기억의 무게와 가치는 저마다의 인생이 소중하듯 모든 개인에게 소중하다. 그러나 공동체가 한 개인의 삶을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왜 기억해야 하는지부터 생각해 볼 일일 터이다. 공동체가 이제 그런 분들을 어떻게, 왜 기억해야 할지, 또 그러려면 무엇이 필요할 것인지를 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준비해야 될 때가 왔다.
도시가 성장과 개발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숨을 돌려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 성찰하는 여유를 만들었으면 한다. 이제 인천은 성숙한 도시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강광 선생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잘 정리하는 일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천이라는 도시가 한 단계 성숙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이현식 문학평론가·인천문화재단 정책협력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