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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불가불가'(이현화 작, 이철희 연출, 3월26일~4월10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는 선택에 관해 말하고 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결정을 하는지에 따라 삶의 경로는 달라진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역사의 시간도 수많은 선택이 빚어낸 무늬의 결을 간직하고 있다.

연극 '불가불가'는 역사에서 그 소재를 가져왔다. 을사조약 체결을 앞두고 열린 어전 회의에서 김윤식은 불가불가(不可不可)란 네 글자의 한자를 적어서 제출한다. 띄어쓰기 없이 붙여 쓴 네 글자는 읽기에 따라서 그 해석이 극명하게 갈라진다. 불가, 불가로 끊어 읽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부정의 의미를 지닌다. 반면 불가불, 가로 끊어 읽으면 하지 아니할 수 없어 가능하다는 긍정의 의미를 지닌다.

불가불가에 대한 기록은 매일신보 1922년 1월19일자 3면에 등장한다. '당시 합방에 대한 참의부의 의견을 하문할 때 '불가불가'라고 써서 대답한 사람인 바 이 불가불가의 넉자는 조선인 측으로 보면 불찬성이란 의미인데 일본인으로 보면 불찬성은 불가라는 의미'라고 매일신보는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는 김윤식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다루면서 불가불가의 해석을 함께 전하고 있다.

연극 '불가불가'는 우리 삶의
순간순간 내리는 결정·선택에
책임 따른다는 진실 환기 시켜줘


불가불가로 붙여 쓴 네 글자의 제출은 판단의 중지이자 기피이다. 읽는 사람이 어느 호흡에 끊어서 읽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도록 함으로써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결정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얼핏 중립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도 좋고 저도 좋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의 무관심일 뿐이다. 마땅히 책임져야 할 선택의 순간을 회피함으로써 힘의 논리에 따른 결정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판단의 중지와 기피는 윤리의 결핍이다.

역사에서 판단의 중지가 가져온 참사의 목록에서 빠질 수 없는 사례에는 아이히만이 있다. 나치는 유대인 학살을 자행하는 동안에 독특한 언어 규칙을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대인 절멸이 아니라 그것을 최종해결책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 언어 사용에 있어 가치를 삭제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주도한 학살을 설명하면서도 상투적인 말이나 관청에서 쓰는 관용어, 그리고 선전 문구 등의 말들을 자연스럽게 사용했다고 한다. 자신은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아이히만의 주장은 판단의 중지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민주 사회에서 시민이 갖춰야 하는 덕목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비판적 사유 역량이다.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현대 사회에서 공동선의 가치를 확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비판적인 사고를 시민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시민이 내리는 결정 하나하나가 갈등을 사회화하고 그렇게 공론장이 풍요로워질 때에만 힘의 논리에 의한 갈등의 사유화를 넘어 대화와 타협에 의한 의사결정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서 시민이 마땅히 내려야 하는 것은 판단의 중지가 아니라 공적 개입이다.

그 것은 윤리의 상상력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대화 상대의 의견에 대한 거부가 민주주의의 덕목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대화와 타협을 위한 자리에 함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하며, 그가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인정의 다른 이름이 바로 관용이다. 그렇기에 관용은 책임을 회피하는 중립으로 위장한 판단의 중지나 기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연극 불가불가는 우리가 삶의 순간순간 내리는 결정과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는 진실을 환기하고 있다. 그 책임은 사람에 대한 책임에서부터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에 이르기까지 궁극적 선택의 순간이 윤리의 상상력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내리는 결정이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에 답하는 것이다. 역사의 극장이 전하고 있는 교훈은 그 선택의 순간에 판단의 중지나 기피를 거부하지 못할 때 어떤 결말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