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사이에 문학인들도 바빴다. 특히 페이스북은 특정 정치인, 정치 세력을 지지하고 다른 입장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야말로 문학이 정치에 바싹 다가서다 못해 착 하고 달라붙는 형세가 되었다.
과거에 필자도 '생각없이' 어느 분이 시장 재선을 하는데 지지선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 분이 권력의 음모에 희생될 상황이라고 생각했고, 아는 사람을 통해 그런 것을 해달라고도 하니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생각이란 알 수 없다. 더구나 정치적 판단이란 어제와 오늘이, 그리고 내일이 같으리라 생각할 수 없다. 불과 몇 년 지나지도 않는 사이에 나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워낙 몇 사람 안되는 사람들이 모여 지지를 표명한 것이었고, 뉴스에도 거의 오르내리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진보·보수라는 이분법 절대화 방식
선과 악 한쪽으로 모는일 지양돼야
공론의 장 잘못 쓰면 나쁜것 될 수도
이번 대통령선거 때는 양상이 아주 달랐다. 문학인들 치고 '좌파' 아닌 사람이 얼마 없다고 할 정도로 현재의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넘치고 당선인 쪽을 지지한 사람들은 아주 적었다. 페이스북 같은 '공론장'에서 이런 분위기는 아주 두드러졌다. 대선은 분명 정치적 사안인데, 반드시 누구를 지지해야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식의 극단적 태도가 공공연히 표명되기도 했다.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면 절대 누구는 안 되고 누구여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한국 정치는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나의 기억에는 노무현 정부 때부터였다. 그때 나는 이런 구분법을 심각히 우려했다. 이런 명명법이 '민주'와 '독재'라는 그때까지 유지되어 온 선명한 구분선을 흐리게 하고, 정의와 부정의를 변별할 수 없게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국민 대부분이 보수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는 한국 정치에서 '진보'를 표나게 내세우는 것은 소수파가 되기로 작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도 생각했다.
이제 나는 다른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에 반대한다. 무엇이 진보인지 우리는 과연 얼마나 명백히 확신할 수 있는가? 또한 토머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말했다. 진보는 손실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이다. 진보라는 것은 손실 없는 개선과 혁신과 혁명인 것만은 아니며 여기에도 손실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또한 무엇이 진정한 보수인지, 누가 과연 자신할 수 있는가? 보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독재적 마인드는 얼마나 많으며 실제로도 그 상당수는 독재체제에 기대어 권력과 부를 누려오지 않았던가?
민주주의를 위한 경쟁 대신에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을 절대화 하는 방식, 그 어느 한 쪽에 '선'을 독점시키고 '악'을 다른 쪽에 쓸어붙이는 방식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옳고 다른 한 쪽은 완전히 그르다는 확신에서 벗어나야 하며, 늘 '나' 자신이 틀릴 수 있고 '타자'가 옳을 수도 있다는 염려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의 척도는 인간적인 가치 요구
특정 정치인 지지 도구 되어선 안돼
페이스북은 좋은 공론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좋은 도구도 잘못 사용되면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문학인들에게 페이스북은 얼마나 좋은 소통의 도구인가? 그것은 '영업력' 없는 문학인들에게도 기회를 선사한다. 반대로 다시 돈 있는 출판사, 기관의 선전물이 될 수 있다. 또한 정치적 야심을 품은 문학 종사자들의 이용물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문학의 척도는 인간, 인간적인 것, 인간적인 가치가 되어야 하며 특정한 정파, 특정한 정치인을 지지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글을 쓰는 바로 어제, 광주에 다녀왔다. 광주송정역에서 내려 운천역으로 갔다. 광주송정역 앞에 '똠양꿍'이라는 태국음식점이 있었다. 끼니를 때우러 들어갔을 뿐인데, 최고의 맛이었다.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데, 서울에서 내려온 지 6개월만에 코로나가 터졌고, 여기는 그렇지 않아도 서울과는 다르다고 한다. 마음 쓸쓸하고도 편치 않게 하는 광주 도심의 풍경들을 머리 속으로 그리며 그래도 다시 한 번 민주주의 하나만으로 모든 시민적 삶을 가늠해 보자고 생각하는 것이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