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수면 위로 드러난 지 11년이 지났다. 피해자와 가족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소재로 한 '공기살인'이라는 영화가 개봉하는 등 사회적 관심도 계속되고 있다.
유진웅씨, 아내 기관지 절개 수술
2014년 언론 보도 이후 원인 알아
재심사 받아서야 '경도 피해' 등급
인천 서구에 거주하는 유진웅(77)씨는 지금도 17년 전인 2005년을 떠올리면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당시 유씨는 뇌종양 수술을 받고 안정을 취해야 하는 아내 김경자(76)씨를 위해 침대 옆에 24시간 가습기를 틀어놨다. 장기간 가동하는 탓에 가습기를 매번 청소하기 어려워 유씨는 가습기살균제를 자주 사용해왔다고 한다.
가습기살균제를 쓰기 시작한 이후 아내 김씨는 숨 쉬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유씨는 아내를 위해 호흡에 도움을 주는 양압기까지 구매해 착용하도록 했지만, 아내는 '가슴이 답답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지 2년이 지난 2007년 유씨의 아내는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응급실에 실려갔고, 그곳에서 천식 진단을 받아 기관지를 절개하는 수술을 받았다.
김씨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졌다. 2009년에는 갑상선암, 2017년에는 설암(혀에 발생하는 암)이 발병해 병원을 찾는 날이 더욱 많아졌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유씨는 아내를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아내가 언제 호흡곤란 증세를 보일지 모르기 때문에 유씨는 잠깐의 외출도 하기 어렵다. 1주일에 한 번 요양보호사가 집을 찾아올 때에만 잠시 밖에 나가 시장을 가거나 은행을 들린다고 한다.
유씨는 아내가 처음 천식에 걸릴 당시만 하더라도 왜 새로운 병이 생겼는지 몰랐다고 한다. 이후 2014년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가습기살균제 때문에 아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씨는 "인체에 무해하다는 문구를 보고 가습기살균제를 썼는데, 내 손으로 아내가 독극물을 마시게 했다"며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미어진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유씨의 아내인 김씨는 몸 여러 곳에 암이 발병하며 17년째 병마에 시달리고 있지만, 가습기 살균제 피해 등급은 고작 '경도 피해'에 해당한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등급은 ▲초고도 피해 ▲고도 피해 ▲중등도 피해 ▲경도 피해 ▲경미한 피해 ▲등급 외 분류 등 총 6단계로 나뉘는데, 김씨는 4번째로 낮은 등급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마저도 2019년 유씨가 환경부에 재심사를 요청해 인정받은 것으로, 처음으로 피해구제 대상으로 인정됐을 때에는 등급 외 분류 판정을 받았다.
피해 등급에 따라 매달 받을 수 있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위한 요양 생활 수당은 최대 185만원에서 0원까지 차이가 난다.
매월 185만원의 생활 수당을 받는 초고도 피해 등급을 받으려면 자가 호흡이 불가능한 상태여야 한다는 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설명이다.
이정구씨 아들도 신청 두차례 거부
작은 보상 받기까지 5년 시간 걸려
옥시·애경 거부 '조정안' 무산 위기
이정구(가명·51)씨도 피해 등급에 대해 분통을 터트렸다. 이씨의 아들(24)이 호흡 곤란을 호소한 뒤 10년 넘게 고통받고 있지만, 피해 구제 신청을 두 차례나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천식이 2018년에야 피해가 인정되는 호흡기 질환으로 분류되면서 2년 전에 경도장애등급 판정을 받았다"며 "그동안 고통을 겪은 아들이나 아이를 돌보느라 몸과 마음이 상한 가족들의 피해를 조금이나마 보상받기까지 5년이 넘게 걸렸다"고 말했다.
사회적참사특별보상위원회가 2020년 발표한 '가습기살균제 노출 실태와 피해 규모 추산' 자료를 보면 인천지역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5만4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인천지역에서 지난 3월까지 정부에 피해 신청을 접수한 사람은 490명에 그쳤고, 이 중 피해구제 인정자는 287명에 불과했다.
올 3월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가 피해등급과 나이에 따라 생존자는 최대 5억원, 피해자 유족은 2억~4억원을 지원받는 조정안이 마련됐다. 조정위원회에는 피해자 대표들과 가습기살균제를 제조·유통한 9개 기업이 참여했다.
그러나 가습기살균제 판매량의 60%를 차지했던 옥시레킷벤키저와 애경산업이 이를 거부하면서 조정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구제를 돕고 있는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오랫동안 고통받아온 피해자와 가족들을 생각하면 기업들이 하루빨리 동의해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대한 지원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