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호_-_수요광장.jpg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작가 박경리 선생은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여 한국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의료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가족사만 보면 참으로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런데 '토지'를 통해 불우한 난경(難境)들을 천혜의 거봉으로 바꾸어놓은 이 거장에게 '시인 박경리'라는 이름은 조금 생소해 보인다. 하지만 선생은 첫 시집 '못 떠나는 배'(1988)로부터 시작하여 '도시의 고양이들'(1990), '자유'(1994), '우리들의 시간'(2000) 그리고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2008)까지 모두 다섯 권의 시집을 펴낸 엄연한 '시인'이다. 선생의 시를 집성한 '우리들의 시간'(2012)에는 마지막 유고시집에 실린 시를 제외한 129편이 실렸으니 '시인 박경리'라는 이름이 맞춤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선생의 전작 유고시집 포함 169편
소설가로 고된 삶에 맑은 샘물같은
詩 집필… 시는 마음 가는곳 따라
기억이 지시하는 쪽으로 투명하고
질박한 서정적 충격·감동 담아냈다


선생의 첫 시편은 장시 '바다와 하늘'이다. 1954년 자신이 근무하던 상업은행 행우회에서 발간한 사보 '천일' 9호에 '박금이'라는 본명으로 발표한 16연 159행의 작품이다. 이 작품이 최근 발굴되어 박경리의 전작(全作)은 유고시집을 포함하여 모두 169편으로 늘었다. 소설가로서의 팍팍한 삶에 맑은 샘물과도 같았을 시 쓰기는 타계 직전인 '현대문학' 2008년 4월호에 '까치설', '어머니', '옛날의 그 집' 등 세 편이 발표된 것만 보아도 선생에게 매우 중요한 실존적 제의(祭義)였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박경리 문학의 처음과 마지막은 모두 시(詩)였다.

'바다와 하늘'은 의인화와 극적 방식을 써서 바다를 장군으로 비유하고 하늘을 용신으로 비유한 작품이다. 작가 사후에 발굴된 것이다. 그 후 선생은 지속적으로 시를 써두었다가 균질적이고 정기적으로 시집을 출간하였다.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긴 낮 긴 밤을/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글을 썼던 사람/육체를 거세당하고/인생을 거세당하고/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사마천') 사랑의 기억도 없이 긴 낮 긴 밤을 앓았을 사마천과, 남편과 아들을 잃고 집필에 매달린 박경리는 어느새 선생의 기억 속에서 은유적 상동성(相同性)을 띠게 된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글을 썼던 사람"이 기록해가는 '진실'이야말로 육체와 인생의 제약을 넘어 언어의 대지로 나아가는 길목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사마천과 박경리 두 사람의 결속성을 전적으로 충족시킨다.

그러한 힘은 육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정신적 자유에서 태동한 것이었다. "이상한 일은/하나의 틀 속으로/연방/사람을 몰아넣으면서/눈에 핏발 세우고/자유를 외쳐대는/사람의 얼굴이다//모순은 아마도/사람에게/말하는 입이 있기 때문이리라"('자유') 화자는 하나의 틀 속으로 사람을 몰아넣는 일에 굳건히 저항한다. 그 저항은 "눈에 핏발 세우고/자유를 외쳐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생성된다. 사람에게는 "말하는 입"이 있어 모순을 발생시키는데 그 모순의 다른 이름은 '자유'일 것이다. 결벽증과 자존심으로 한세상을 버텨온 선생은 "싫은 일에 대한 병적인 거부는/의지보다 감정이 강하여 어쩔 수 없었다"('천성')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에게 '자유'를 함의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렇게 선생의 시는 마음 가는 곳을 따라, 기억이 지시하는 쪽으로, 잔잔하고 투명하고 질박한 서정적 충격과 감동을 담아냈다. 그리고 그 시편들은 거장 박경리의 존재론적 원형을 담고 있을 것이다.

지난 5일, 선생의 14주기를 기리는 문학축전에 참여하기 위해 작가의 고향 통영에 다녀왔다. 선생은 2008년 5월5일 어린이날에 어린이처럼 순연한 모습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지난 8일 어버이날, 선생보다 더 험난한 형극의 길을 걸어온 김지하 시인이 별세했다.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했던 '장모-사위'는 그렇게 '어린이-어버이'처럼 가시어, 한 분은 통영에 한 분은 원주에 모셔졌다. 엄숙한 한 시대의 종언이요 근대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하고 우뚝한 기록이 남겨지는 순간이었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