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중앙정부는 1629년부터 1823년까지 제주도에 출륙금지령을 발동하였다. 제주인의 출륙을 막아 그들로써 제주도를 왜적으로부터 방어하도록 삼는 한편 한반도에 말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조처였다.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제주인들은 경래관이 어떠한 패악을 저질러도 그 억울함을 중앙정부에 알릴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언로가 끊기고 만 것이다. 그래서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서 제주인들은 소장을 작성하여 해결을 촉구하는 동시에 소장을 중앙정부에 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민란을 일으켜야만 했다.
민란이 실패하면 소장은 폐기되고 장두는 죽음에 처해졌다. 민란이 성공하면 소장은 중앙정부에 전달되었고, 중앙정부는 소장의 건의 사항을 수용하면서 장두의 목을 베었다. 그러니까 장두는 민란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이래저래 죽음에 처해져야 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왕이 장두를 효수했던 것은 자신이 임명한 관리를 섬 바깥으로 쫓아낸 데 대한 응징이었다. 기실 장두를 앞세운 민란에서 장두가 경래관을 살해하는 일은 없었다. 경래관 살해는 역모를 의미하며 이는 중앙정부와의 전면전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었던 바, 목호의 난 등 중앙정부에 맞섰다가 무참하게 살육당한 기억과 트라우마를 가진 제주 민중들이 역모에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제주성 함락 뒤 역모 의사를 밝힌 전라남도 출신 장두 방성칠이 제주 민중들에게 배척당했던 경우에서 이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조선 중앙정부, 제주에 출륙금지령
억울함 알리려 민란 일으킬 수밖에
실제 장두가 경래관 살해 사실 없어
장두를 공부하면서 오랜 기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였던 사례는 양제해의 난이었다. 장두의 일반적인 면모와 다르게 양제해는 역모 성격을 처음부터 강렬하게 내걸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양제해의 모반' 항목을 보면, 양제해가 무력봉기하여 목사·판관·현감을 죽이고 모든 관아를 장악한 뒤 내륙과의 교통을 차단하고, 제주인에 의한 자치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제주목사 김수기가 중앙정부에 올린 보고서 등에 근거하여 작성된 관점이다. 어째서 양제해의 경우만 유별나게 역모를 통한 탐라국 해방·건설의 기치가 내걸렸던 것일까.
오랜 의문은 '탐라직방설'을 통하여 드디어 풀어낼 수 있었다. 탐라직방설은 다산의 제자 이강회가 흑산도로 유배온 양제해의 사돈 김익강에게 들은 내용을 정리한 문건이다. 이에 따르면, 목사를 등에 업고 300여 명의 아전들이 '상찬계(相贊契)'를 만들어 온갖 패악을 저질렀던 바, 향감(鄕監)·찰방헌리(察訪憲吏) 등을 지낸 양제해는 이를 중앙정부에 등장(等狀)하고자 했다. 그런데 소장 작성 사실이 상찬계 인물에게 밀고되었고, 상찬계 인물은 소장 작성을 모반으로 부풀려 목사에게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장두 양제해를 포함한 여덟 사람은 죽음으로 내몰렸고, 사건 진상은 왜곡된 채 200여 년 동안 전해졌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언로가 봉쇄되고 왜곡되었을 경우 직면하게 되는 극단적인 사례는 단연 제주의 '장두' 장치와 양제해의 난이라 꼽을 수 있다.
거대언론, 특정후보 거짓선전 확산
사회 바로서려면 언론정상화 시급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로 나선 이재명에 대한 거짓 선전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대형 현수막을 잘 보이게 하려고 가로수를 무참히 잘라 내었다는 것이다. 이익을 달리하는 정치 세력이 생성·유포하고, 거대언론이 확산시키는 방식이 작동하고 있다. 지난 대선 기간 내내 거대언론이 이와 같은 태도를 견지하였고, 거대언론이 진작부터 한편으로 기울어진 입장을 견지해왔음은 새삼스럽게 지적할 바도 아니다. '기레기'라는 멸칭이 괜히 나왔겠는가. 2000년대 초반 조·중·동에 맞서는 일환으로 '안티조선 운동'이 펼쳐졌던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은가. 한국 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언론 정상화가 시급해 보인다. 과거 제주인들은 봉쇄되고 왜곡된 언로에 맞서는 나름의 방안을 마련해 내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모색이 필요하다.
/홍기돈 문학평론가·가톨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