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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어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28주기를 맞아 가족들과 함께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에 있는 선생의 묘소를 찾아 추모제에 참여했다. 돌이켜보면 선생께서 민주화운동과 함께 협동조합운동을 펼친 게 60년대였고 생명운동을 시작한 게 70년대였으며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환경운동을 펼치고 한살림운동을 시작한 게 80년대였다. 당시 세상은 그야말로 개발독재요 군사독재 시절이었고 성장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기에 세상에서 선생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선생이 추구했던 가치가 전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게 입증되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흔히 말하는 '선견지명'의 안목을 가졌던 이가 아니라 '선행지명'의 지혜를 실천했던 분이라 하겠다. 선생이 가신 지 벌써 28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선생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많다. 얼마 전 나는 '대장부, 그들이 거기에 있었다'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에는 장일순 선생을 따라 민주화운동, 협동조합운동, 생명운동을 실천해 온 김영주, 이경국, 김상범 세 제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세상에 흔한 성공담과는 크게 달랐다. 그 중 한 대목을 소개한다. 


경험주의자 경험 중시하기 때문에
해보지 않은 일 함부로 이야기 안해


장일순의 제자 김영주는 1966년 춘천시 공보실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당시 서울시장이 그를 발탁할 생각으로 춘천시에 전출을 요청했고 춘천시장 또한 출세하려면 중앙으로 가야한다며 전출을 흔쾌히 허락했다. 며칠 뒤 김영주는 원주의 장일순 선생을 찾아뵙고 서울로 가게 되었다고 인사를 드렸는데 축하해 주리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선생은 지학순 주교가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니 서울로 가지 말고 원주로 돌아와 지학순 주교를 도우라고 했다. 뜻밖의 말을 들은 김영주는 선생이 자신의 출세 길을 막는다고 여겨 이번만은 선생의 말씀을 따르지 않기로 마음 먹었는데 다음 날 오전 아내에게서 이런 전화가 왔다.

"당신 후배 이경국씨가 트럭을 갖고 와서 '무위당 선생이 형님 집 살림을 전부 싣고 원주로 오라고 명령을 내리셨다'면서 안방에서 장롱을 꺼내 차에 싣고 있는데 어찌된 영문이냐?"

결국 다음 날 아침 김영주는 춘천시장실에 가서 사직서를 제출했고 며칠 뒤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관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 내게도 저런 스승이 계시면 좋았을 텐데 만나지 못했다고 한탄하다가 이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스승이 내게 저런 가르침을 내린다면 나는 과연 따를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스승의 가르침은 그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를 만나야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장일순 선생은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사는 사람인가? 높은 데서 부르면 하던 일 팽개치고 달려가는 사람은 열심히 사는 사람이 아니다. 반대로 위에서 불러도 '나는 여기서 열심히 하는 일이 있어서 갈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라'라고 사양하는 사람이야말로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장일순 선생 제자들 보니 모든 사람
출세위해 살아가는건 아니라는 것
이들이야말로 흰까마귀 발견한 자


선생의 말씀은 참으로 옳다. 하지만 세상에는 선생의 말과 같은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흰까마귀를 찾기 어려운 것과 같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비록 단 한 마리도 그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을지라도 흰까마귀는 소중하다. 세상의 까마귀가 모두 검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흄의 이 말을 경험주의자의 겸손이자 희망으로 읽는다.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경험주의자는 자신의 경험에 얽매이거나 휘둘리지 않는다. 경험주의자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말하는 이가 아니라 "내가 아직 해보지 못해서 잘 모르는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경험주의자는 경험을 중시하기 때문에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장일순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 이야기를 통해 세상 모든 사람이 출세를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이야말로 세상의 까마귀가 모두 검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흰까마귀를 발견한 자, 스스로 흰까마귀가 된 이들이 아니겠는가.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