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정작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정조가 부평과 인천을 지나면서 계양산과 소래산 풍경을 읊은 두 편의 칠언절구다. 계양산 노래에서는 계양산의 아름다운 산빛을 묘사하고 온 고을에 풍년이 들기를 기원한 뒤에 앞으로 백성들이 잘살고 공평한 정사를 펼치고 이어나갈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었다.(桂陽山色極嬋娟 百里秋登上上田 民富政平斯可矣 誰能更續武城絃)
이 시는 정조의 뛰어난 언어 감각과 순발력도 나타나 있다. 부평(富平)이라는 지명은 본래 넓은 들판이라는 정도로 해석되는 지명이다. 정조는 지명에다 '민부정평(民富政平)', '잘사는 백성과 공평한 정치'라는 정치적 과제와 이상사회의 비전을 부여한 것이다. 부평은 그만그만한 땅이름이 아니라 정조의 통치철학과 이상사회를 내포한 개념어로 승격한 것이다. 그리고 '무성현'의 고을 '현(縣)'자를 악기의 줄을 의미하는 '현(絃)'으로 바꾸어 표현한 것도 절묘하다. 악기의 줄은 예악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문화정치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래산 군자봉 아름다움에 감탄해 남긴 詩
'어진 정치' 구현할 숨은 군자 간절함 담아내
정조는 서얼이나 지방선비, 중인이나 농민과 같은 신분이 낮은 소민(小民)을 보호하는 나라인 '민국(民國)' 건설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노비제도 개혁 정책과 농촌경제를 살리기 위해 선진적인 농법과 농업경영을 실험했다. 궁을 떠나 행차할 때마다 연도에서 마주친 백성을 가까이 불러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는지를 직접 묻고 해결하기도 했다. 이 시의 '백성을 잘 살게'라는 구절은 백성을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을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던 정조의 위민정신이 함축되어 있다.
정조는 '시냇물을 비추는 달'로 자처하며 백성의 모범이 되려고 했다. 책벌레로 영조의 사랑을 받았던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밤낮으로 글을 읽었으며 신하들과 경전의 해석을 놓고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조가 젊은 정약용에게 '시경'에 관한 800조문이 넘는 질문을 던져 답을 주고 받은 일화가 대표적이다. 이 문답은 '시경강의'라는 책으로 남아 있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수만권의 서책을 구비하고 인재를 초빙하여 개혁의 산실로 만들고자 했다. 그가 지혜로운 군주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 책을 읽고 토론한 결과는 '홍재전서(弘齋全書)'로 간행되었다. 무려 184권 100책에 달하는 분량으로 동서고금에도 이같은 저술을 남긴 학술 군주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정조는 부평에서 인천으로 가는 도중에 또 한편의 시 '소래산의 노래'를 남겼다. 인천 소래산 군자봉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혹시 소래산 군자봉 이름처럼 어진 군자가 숨어 있지 않을까(君子峰高入指點 당非中有隱淪才)하고 자문해보는 내용이다. 군자봉에는 군자가 숨어 있지 않겠느냐는 유머에 어진 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인물을 기대하는 간절함이 담긴 작품이다. 이상 사회를 이룰 정치가가 누군지를 물었던 계양산 노래와 잘 호응한다.
200년전 '民國사상' 오늘날 여전히 실현 과제
문예부흥기 열려던 '문화국가 이상' 현재형
정조는 부평과 인천에 머무르며 지은 시를 인천부사 황운조(黃運祚)에게 써서 관아에 걸어두라고 당부하고 인천을 떠났다. 200년 전 그가 부른 노래도 그 노래 속에 담긴 정조의 꿈을 생각하는 이도 드물다. 정조가 꿈꾸었던 민국(民國)사상은 오늘에도 유효한 정신이며 민부정평의 부평사회도 여전히 실현되지 않고 있는 과제이며, 무성현의 고사를 이어 문예부흥기를 열어보려고 했던 문화국가의 이상도 여전히 현재형인데 말이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