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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최근에 내 책상에서 단편소설을 써서 탈고했다. 당연한 듯 보이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언제나 소설의 중요 부분을 내 책상이 아닌 '바깥에서', 그러니까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써 왔던 것이다. 책상은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쫓길 때나 인쇄를 할 때만 마지못해 앉았다. 그러니 내 방, 내 책상에 들어앉아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쓴 것이 나름대로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책상이 홀대를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나는 항상 큰 책상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하면서 6인용 탁자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식탁으로, 하나는 책상으로 사용하면서 그 꿈을 이뤘다. 마침내 프린트도 올려놓을 수 있고 읽던 책들로 작은 탑을 쌓아도, 스탠드며 향초며 공기정화용 식물까지 모두 거뜬히 담아 놓고도 자리가 넉넉한 책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거기 앉아 책을 읽고 공부할 수는 있어도 소설은 안 써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작업은 '새 소설 쓰기'이고 책상의 가장 큰 의무 또한 소설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책상과 나, 둘 다 그 일에 실패했다. '나는 집에서는 글을 못 쓰는 사람인가 보다, 도서관이든 카페든 사람들 속에 익명으로 섞여야 글이 가장 잘 나오는 모양인가보다' 스스로를 이렇게 생각해왔다.

친구의 선물 평직으로 짠 러그 깔아
차고 딱딱한 책상 포근하게 바뀌어
자꾸 '인력' 느껴지며 소설쓰기 성공


그런데 아주 작은 전환점이 생겼다. 어느 날 팔뚝에 닿는 책상의 감촉이 너무 차가워서 무심코 친구가 선물한 얇은 러그를 반으로 접어 깔아보았다. 러그는 평직으로 짠 직물로, 기하학적 패턴 안에 우주인이 무중력 상태에서 떠 있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러그를 깐 책상에 앉아보았더니 내 팔이 닿는 부분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부드럽고 포근한' 감촉으로 바뀌어 있었다. 책상은 옷을 입은 것처럼 아늑해 보였다.

러그를 책상에 깔아놓은 후부터 자꾸 책상의 '인력'을 느꼈다. 좀 더 자주 앉았고, 앉아서 무중력 상태인 우주인을 들여다보다 말도 걸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노트북을 켜서 그 안에 들어있는 가상의 종이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자주 생겨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책상의 척력은 다름 아닌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었던 것 같다. 그 감촉은 나를 '밀어내는' 느낌을 주었던 모양이다. 촉감은 접촉에 대한 일차적 반응이다. 무의식중에 나는 책상의 달라진 감촉에 감응했던 것 같다.

잊고 지낸 촉감 중요성 떠올리게 돼
좋아하는 것 입혀보니 의외의 효과


아이들이 촉감에 민감하다는 것은 애착 이불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유명한 '라이너스의 담요'도 예전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막상 내 딸이 애착 이불 없이 못 자는 것을 보고서야 라이너스가 낡은 이불에서 무엇을 호출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부드러운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자신을 유지시키는 것! 당연히 중요한 일이다. 어른이 된 우리는 시각과 청각을 가장 많이 사용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는 그렇지 않다. 아이는 눈으로 본 세계를 아직 이해할 수 없고, 귀로 듣는 언어를 아직 해석할 수 없다. 후각이나 미각은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반면에 촉각은 자기의 신체가 닿는 곳에서 이루어지니 적극적인 면이 생겨난다. '나'라는 경계를 확인해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세상에 대한 정보를 스스로 캐오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피부'라는 경계 밖의 세계에 대한 작은 탐험, 그로 인한 인지가 그쪽으로 나아가게도, 물러서게도 하는 것이다.

책상에 옷을 입히면서 오랫동안 잊고 지낸 촉감에 대한 중요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책상을 '호감형 촉감'으로 바꾼 효과를 톡톡히 보았으니까. 당신은 어떤 촉감을 선호하는가? 빳빳하고 정갈한, 면이나 린넨이 주는 정직한 감촉? 아니면 융이나 벨벳이 주는 도톰하고 폭신한 감촉? 실크처럼 매끈하고 피부에 감겨드는 감촉? 무엇이 됐든 좋아하고 자주 시간을 보내는 사물에 좋아하는 감촉의 옷을 입혀 보시라. 의외의 효과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