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聖) 김대건(1821~1846)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다. 최방제(생년미상∼1831), 최양업(1812~1861) 등과 함께 신학을 공부했다. 일행 중에 최방제는 일찍 풍토병으로 선종했고, 김대건 신부의 뒤를 이어 최양업 신부가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가톨릭과 기독교가 근대 한국의 종교·생활·문화에 끼친 영향은 필설로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크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가톨릭교회사의 새 역사를 연 인물이다. 최근 김대건 신부가 요즘 세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나뉘어 여러 곳으로 분배되었다는 놀라운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 창시자나 성인의 유해가 여러 곳으로 분배된 사례가 있다. 불교가 대표적이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자 그의 유해를 두고 갈등이 벌어졌다. 팔리어 경전 '마하파리닛바나'에 따르면, 석가세존의 열반 직후 마가다국의 왕 아자타삿투를 비롯한 통치자들이 서로 부처 사리의 소유를 주장하고 나섰다. 자칫 전쟁마저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 이 갈등과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 결국 다비(茶毘)된 부처의 유해(사리)를 나누기로 했다. 부처의 사리를 받은 나라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기념물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불탑의 기원이다. 불멸(佛滅) 후 수백 년이 지난 뒤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 왕은 이때 조성된 8기의 근본불탑 가운데 1기만을 제외한 나머지 7기의 사리를 꺼낸 뒤 이를 나눠 인도 전역에 사리탑을 조성하도록 했다. 불탑을 이용하여 국가 통합과 민심 수습을 시도한 것이었다.
아쇼카 이후 동시대 인도의 무덤 형식이던 스투파는 불교가 전래된 나라별로 다양한 형식의 불탑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불타의 진신 사리를 봉안한 사찰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통도사를 비롯하여 5개의 대표적인 적멸보궁이 있다.
불교는 그렇다 해도 가톨릭에서 유해를 나누는 것은 낯설고, 또 역사적 인물의 유해 관리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여러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 놀랍다. 앞으로 이 역사적 인물의 유해를 잘 봉안하고 관리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우선인 것은 모든 종교들이 자신의 사회적 책임과 소명을 다하는 일일 것이다.
/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