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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 민족은 나라 밖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일제는 식민지 청장년을 제국의 노동노예로 강제징용했다. 독립투사들은 광복 투쟁을 위해, 수많은 동포들은 먹고 살기 위해 중국동북지방과 러시아 연해주에 둥지를 틀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광복, 이어진 6·25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이주지에 갇혔다. 일본의 자이니치,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고려인의 100년 넘는 디아스포라 여정은 우리 역사의 아픈 손가락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고려인'의 역사적 통증은 각별하다. 자이니치, 조선족들은 모진 차별 속에서도 이주지에 민족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었다. 반면 고려인들은 끊임없이 이주를 강요받았다.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1937년 연해주 거주 고려인 17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속에서 사망한 고려인들이 기차 밖으로 버려졌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황무지에 내동댕이쳐진 고려인 중 상당수는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등지로 또 한 번 흩어졌다. 그들은 맨손으로 황무지를 논밭으로 만들어낸 기적으로 생존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러시아와 신흥 독립국가들로 해체되자, 소련 국적 고려인들은 다른 국적민들로 뿔뿔이 흩어졌다. 해체과정에서 국적을 증명하지 못해 무국적자가 된 고려인들이 부지기수라니, 몇 대에 걸친 역사적 유랑의 결과치고는 혹독하다.

최근 우크라이나 고려인들이 전쟁터를 벗어나려 모국으로 속속 입국하고 있다. 폴란드 몰도바 등지로 피난했다가 최종적으로 대한민국을 찾은 것이다. 정부도 지난 3월부터 여권도 비자도 없는 고려인 난민들에게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벌써 1천200여명의 동포들이 인천 함박마을을 비롯한 전국의 고려인 마을에 피난처를 마련했다.

그런데 항공료가 없어 피난하지 못한 동포들도 많고, 맨몸으로 피난 온 동포들은 생계가 막막하단다. 민간에서 항공료 지원 모금행사를 열었다 하고, 지난 9일 인천시청 앞에서는 피난 동포들이 당장의 생계지원을 호소하는 기자회견도 열었다 한다. 고려인에게 진 역사적 부채를 생각하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은 인도적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 책무여야 맞다. 항공료 지원과 생계대책 및 일자리 주선 등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낄 이유가 없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