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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객원논설위원
1941년 9월 말 독일군대가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를 봉쇄했다. 러시아인들의 문화적 긍지인 레닌그라드를 함락시키면 소련 장악은 시간문제로 판단한 것이다. 그 와중에서 히틀러는 소련 농무성 응용식물분류국의 종자은행 탈취를 시도했다. 육종학의 선구자인 러시아의 니콜라이 바빌로프 박사가 전 세계 64개국에서 발품을 팔아 확보한 신품종 17만여 씨앗들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정복지인 러시아 서쪽에 독일인 농업이민을 위해 우량종이 필요했다.

독일군이 가장 탐을 낸 품종은 서양인들의 주식인 감자였는데 당시 종자은행에는 바빌로프가 남미의 안데스산맥을 누비며 확보한 6천 품종 이상의 감자 수천 킬로그램이 보관되어 있었다. 연구원 60여 명과 인근 주민들은 독일군의 눈을 피해 10만여 점 이상의 표본과 5t의 각종 식량 종자들을 헤르첸가 44번지의 허름한 건물로 옮기고 직원 3∼5명씩 교대로 24시간 감시했다.

독일군의 장기봉쇄에 따른 식량난과 혹한, 그리고 쥐들과의 전쟁이 연구원들을 피폐케 했다. 1942년 1월 바빌로프의 제자이자 가장 연장자인 드미트리 이바노프 연구원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쌀이 가득 찬 포대들에 둘러싸인 채 숨을 거두었다. 주목되는 것은 이바노프가 굶어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지키던 쌀은 단 한 톨도 먹지 않았다는 점이다. 독일군의 봉쇄는 1944년 봄까지 900여 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종자은행의 연구원 30여명이 이바노프처럼 먹거리로 가득 찬 식량창고 안에서 굶어죽었다. 900여 일의 봉쇄기간 동안에 러시아인 수십만명이 아사했다. 


16C 스비아토히르스크 라브라 수도원 전소
러軍, 우크라 침략 보물급 문화재 파괴 약탈


지난 5일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국립 자연공원 내에 위치한 스비아토히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이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전소(全燒)되었다. 이 수도원은 16세기에 건축된 우크라이나 정교회 3대 성지 중의 하나로 매년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방문했었다. 지난 2월 말 러시아군의 침략 이후 우크라이나 곳곳의 문화유적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국 버지니아박물관은 위성추적조사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교회 58곳과 모스크, 사원, 대성당 등 111곳, 기념물 9곳 등의 피해를 확인했다. 러시아의 야만적인 반달리즘(문화파괴주의)이 눈길을 끈다.

러시아군대의 보물급 문화재 약탈은 설상가상이다. 우크라이나 남동부에 위치한 마리우폴 시당국은 지난 4월29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러시아군이 마리우폴 내 미술관과 박물관 세 곳에서 2천점 이상의 미술품과 문화재들을 가져갔다"고 밝혔다. 수기(手記)의 유대교 경전(토라), 그리스어 신약성경(1811년판) 등 가치를 환산하기 어려운 귀중한 문화재들 및 마리우폴 출신의 19세기 풍경화가 아르히프 쿠인지의 대표작과 러시아 낭만주의 화가 이반 아이바좁스키의 작품 등 고가(高價)의 미술품 10여 점이 포함되었다.

러시아군은 크림반도와 마리우폴 사이에 있는 멜리토폴에서도 문화재를 대거 탈취해갔다. 우크라이나의 국보급 문화재인 기원전 4세기경 스키타이의 황금 장신구도 포함되었다. 스키타이인은 BC 8 ~ AD 2세기에 걸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카자흐스탄 일대를 지배했던 유목 민족이다. 1973년에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길이 36㎝의 황금보검은 신라 왕족의 '스키타이기원설'의 단초를 제공했다.

기원전 4C경 스키타이 황금 장신구도 포함
약탈국들의 '궤변' 푸틴은 어떻게 설명할까


엘기니즘(Elginism)은 다른 나라의 문화재를 약탈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1806년에 그리스주재 영국 대사 토머스 엘긴 경이 파르테논신전의 대리석 조각들을 떼어내 영국으로 불법 반출한 데에서 유래했다. 이 조각품들은 지금도 런던의 대영박물관을 찾는 전 세계 관광객들에 눈요기로 제공되고 있다.

유네스코가 1979년에 불법반출 문화재의 원(原) 소유국 반환협약을 제정했지만 문화재 약탈국들은 궤변(?)으로 대응했다. 만일 자신들이 보관하지 않았다면 문화재들이 더 많이 파괴되었을 것이란다. 유명한 '엘긴의 변명'이다. 우크라이나의 르비우 국립박물관장인 타라스 보즈니약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예술품과 역사를 없애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든다"며 의심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문화재 약탈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