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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수 노무사
너무나 필수적인 나머지 풍경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 기관사, 거리의 청소부, 그리고 학교 급식실의 노동자들. 한국 사회는 긴 시간 동안 급식을 무상으로 할 것이냐, 의무로 할 것이냐, 아이들이 먹는 밥은 복지인가 아닌가를 치열하게 따져 논하면서도 정작 그 밥을 만들어 제공하는 사람들의 존재와 복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고백하건대 나 또한 급식을 먹던 시절에는 점심밥을 수북이 퍼주던 분홍 앞치마의 존재를 당연한 풍경으로 여겼었다.

원래 늘 자리를 지킬 것 같던 존재가 낯선 곳에 있을 때야 다시금 필요를 깨닫는 법이다. 그래서 분홍 앞치마를 입은 급식 노동자들은 지난 15일 학교가 아닌 서울 용산의 거리로 나섰다. 대통령에게 점심 한 끼를 같이 하자고 했다. 우리가 '의무 급식'의 당연한 풍경으로 여겼던 동료 노동자들의 아픔과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앞으로는 그 죽음을 막기 위해서다. 점심은 성사되지 못했다.

죽음의 원인은 급식실에서 오랜 기간 노출된 하얀 연기, '조리흄(cooking fume)' 때문이다. 조리흄은 뜨거운 기름으로 요리할 때 발생하는 초미세분진으로, 국제암연구소(IARC)는 2010년부터 조리흄을 폐암을 유발하는 발암물질로 규정하고 있다. 급식 노동자는 1명당 수백인 분의 식사를 만들기 때문에 한번에 많은 양의 조리흄에 노출되고 있다. 


급식실 하얀 연기 '조리흄'에 노출
폐암 발암 물질로 지난해 첫 산재


세계적으로 조리흄의 위험성이 대두된 것은 오래 전이지만 한국에서는 그 경고음을 무시해왔다. 그러다 지난해 2월 급식실 노동자의 폐암이 처음으로 산재로 인정되고 나서야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올해 5월까지 폐암으로 산재를 신청한 급식 노동자는 60명을 넘는다. 급식 노동의 위험성이 알려진 후 겨우 1년 동안의 기록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다. 비흡연 여성 환자는 몸이 아파도 미처 폐암일 거라 예상하지 못해 진단 시기가 늦는 경향이 있으므로, 퇴직자를 포함하여 아픈 노동자들의 잠재적 숫자가 얼마나 더 있을지 쉽게 예상하기 어렵다.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해지자 정부도 대안을 내놨다. 55세 이상이거나 급식 업무에 10년 이상 종사한 노동자에 대해 저선량 폐 시티(CT) 촬영을 통해 건강진단을 하기로 했다. 없는 것보다는 반가운 조치지만, 왜 10년인지에 대해서는 못내 의문이 남는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학비노조)은 건강진단 대상자가 지나치게 협소하므로 5년 이상 종사자로 확대해달라고 건의했지만 끝내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다. 따라서 급식 업무에 9년, 8년 종사한 근로자는 긴 시간 조리흄에 노출됐음에도 폐암 진단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기계적 기준은 근로복지공단도 암묵적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의뢰인 중 급식실에서 9년11개월 일한 노동자에 대해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유해물질 노출 이력이 짧다"라고 봤다. 다만 급식실이 아닌 다른 조리 업무 이력이 약 1년 정도 더 있었기에 산재로는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조리흄 노출 기간이 10년 1개월이면 충분히 길고, 9년 11개월이면 아쉽게도 짧다는 것인가? 인정 판정을 받았음에도 석연치 않았다.

CT촬영 지원 종사 10년 이상 제한
학비노조의 5년 확대 요청 미반영
산재 인정 받고자 더 많은 노력 필요


공단은 5년 이상 급식실에서 일한 노동자의 폐암은 산재가 아니라고 판정하기도 했다. 급식실의 위험성에 대해 공론화가 이뤄졌지만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노동자의 질병이 산재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 "당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 기준"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판례 원칙이다. 어떤 노동자에게는 5년이 암이 발생하기에 충분한 시간일 수 있다. 급식실에는 조리흄 뿐만 아니라 독한 세척제, 고용 불안정성, 과로 등 복합적인 유해인자가 넘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픈 노동자들이 더 넓게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도와 노력들이 필요할 것이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지난해 말, 급식 노동자들이 학교를 비우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 필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단지 불편함에 대한 불만으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 급식 노동자들은 죽음의 되풀이를 막기 위해 급식실 환기 시설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정말로 당연한 것은 밥 짓는 사람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들 모두가 건강하게 일할 권리다.

/유은수 노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