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급날이면 웨하스나 알사탕 한 봉씩 사다 주던 다른 총각 아저씨들과 달리 말이 없던 화가 아저씨는 나한테도 별 관심을 준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서령아, 불렀다. 농담 같지만 그 목소리가 나는 기억난다. 서령아.
나는 마루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스케치북을 펴 중간에 가로선을 길게 쭉 긋고(그건 벽과 바닥의 경계선이었다) 아이 셋과 어른 둘을 그렸다(그건 우리 가족이었다). "아저씨가 뭐 하나 가르쳐줄까?" "뭘요?" 아저씨는 내 스케치북 한 장을 넘겨 새 종이를 편 뒤 선 세 개를 그었다. 먼저 세로선을 위에서부터 3분의 2 지점까지 긋고, 그 선 마지막에서 가로선 하나를, 그리고 사선을 그었다. 이게 뭐지?
"이게 뭘까?" 아저씨는 종이를 들어 올려 내가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잠시 바라보던 내가 아! 탄성을 질렀다. 그건 놀랍게도 '방'이었다. 가로선 하나로 내가 긋던 벽과 바닥이 아니라 벽이 두 개고 바닥이 있는, 어떤 공간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바닥을 들어 입을 막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평평한 종이 안에 공간이 있다니!
문간방서 그림 그리던 '특별한 사람'
어느 날 스케치북에 가르쳐준 선 3개
종이 위에 만들어진 '공간'에 화들짝
나는 아저씨가 그려준 그 공간에 방문을 만들고 액자를 걸고 창문을 만들었다. 서랍장도 그리고 텔레비전도 놓았다. 바닥에는 밥상도 그렸다. 맙소사. 그날 나는 따뜻하고 다정한 방 하나를 그릴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총각 아저씨는 드문드문 내 그림을 보아주었다. 그리고 얇은 화집 한 권을 보여주었는데 외국 아이들의 그림집이었다. 나는 화집 속 낯설고 희한한 아이들의 그림을 매일 따라 그렸다. 아저씨는 퇴근 후 내가 따라 그린 그림을 보면서 웃었다. "넌 천재가 될 거야. 정말이야. 나는 너 같은 아이를 여태 본 적이 없어."
유치원에 다니지 않던 나, 친구도 없던 나, 오로지 집에서 책만 보고 그림만 그리던 나는 그런 말을 처음 들어서 오직 아저씨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아저씨가 언제 우리 집을 떠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화집을 주고 갈 순 없다며, 챙겨가는 바람에 서운했던 마음만 남아있다.
오직 아저씨만 보여주려고 그림 그려
딸에게도 방법 알려주자 나처럼 놀라
슬프게도 나의 재능은 거기까지여서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자라지는 못했다. 며칠 전 여덟 살 딸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이도 어린 나처럼 가로선 하나를 쭉 긋고 벽과 바닥을 나누었다. "엄마가 뭐 하나 가르쳐줄까?" "뭘?" 나는 총각 아저씨가 그랬듯 세로선, 가로선, 사선으로 방 한 칸을 그려주었다. "이게 뭔지 알겠어?" 그때의 나처럼, 아이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이거! 이거…… 방이야! 엄마, 이거 방이잖아!" 아이는 방문을 그리고 창문도 달고 액자도 걸고 서랍장도 넣었다. 카펫을 깔고 탁자를 놓고 커피잔 두 개도 놓았다. "넌 천재가 될 건가 봐. 엄마는 너 같은 아이를 여태 본 적이 없어. 정말이야." 아저씨가 했던 말을 나는 아이에게 해주었다. 딸은 그날 아주 예쁜 방 한 칸을 완성했다.
/김서령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