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관비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어효랑의 배려로 보인다. 어무적은 어려서부터 시재가 뛰어났다.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새벽에 절간을 지나면서 시 한 수를 읊었다. '청산도 손님 오자 예절을 차려, 머리에 흰 구름의 갓을 썼도다(靑山敬客至 頭戴白雲冠)'라는 시였다. 그러나 그는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시의 재능은 뛰어났으나 서얼이어서 과거시험과 같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할아버지 때 김해로 내려갔으나 아버지는 사대부였지만 어머니가 관노비여서 법의 규정에 따라 어무적은 관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관노였던 그가 어떻게 노비의 신세를 면하게 되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서얼이었던 그에게 신분에 맞게 주어진 미관말직이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이었다.
가난한 백성 탄식 귀담아 듣던 시인
상소문에 힘겨운 삶 잘 드러나 각별
어무적은 1501년(연산군 7년), 김해에서 백성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생활고를 낱낱이 밝힌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렸으나 무시되고 말았다. 상소문에는 지배계급의 향락 근절과 민생의 보호와 임금의 군주다운 자세의 확립과 선비의 각성, 그리고 언로의 창달을 위한 간절한 뜻을 담았었다. 이를 신유상소(辛酉上疏)라 하여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7년 신유 7월 을해조(乙亥條)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선조 임금은 지방수령들의 폐습과 악행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올라오는 상소문을 빼놓지 않고 읽었다. 특히 어무적의 상소에 백성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어 각별하게 다루었다. '어무적의 시에 궁궐에선 백성 걱정해 조서를 늘 내리는데, 주현(州縣)에서 한낱 그저 종이로만 전해 받는다고 노래하고 있으니 옳은 지적이로다. 나라의 폐습이 그러하니 드러나는 대로 죄를 주어 사정(私情)으로 요행히 면제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엄히 명을 내렸다.
어무적이 살던 고을에서 매화나무에까지 무리한 세금을 부과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분노한 백성이 매화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본 어무적은 함께 분노하면서 '작매부(斫梅賦)'라는 시를 지어 관리의 횡포를 규탄했다. 이에 담당관리가 잡아 벌을 주려 했으나 도망쳐서 벌을 면하기는 했지만 이곳저곳을 떠돌던 중에 어떤 역사(驛舍)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백성들의 어려움이여… 흉년들어
나는 너희를 구제할 마음 있어도…'
유랑민 대변 '유민탄'·'신력탄' 유명
신분이 미천해 생애가 구체적인 기록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당대에 문학적 재능은 높이 평가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속동문선(續東文選)'과 '국조시산(國朝詩刪)'에 그의 시가 실려 있다. 특히 유랑하는 백성의 어려움을 대변한 '유민탄(流民嘆)'과 '신력탄(新曆嘆)'과 같은 시는 후대에까지 전해지고 있는 유명한 작품이다.
'백성들의 어려움이여, 백성들의 어려움이여/흉년 들어 너희가 먹을 것이 없을 때//나는 너희를 구제할 마음은 있어도/너희를 구제할 힘이 없구나//백성들의 괴로움이여, 백성들의 괴로움이여/날이 추워도 너희가 이불이 없을 때//저들은 너희를 구제할 힘은 있어도/너희를 구제할 마음이 없구나//원컨대, 소인의 마음을 돌려서/잠시 군자의 걱정을 하고/잠시 군자의 귀를 빌려//백성들의 말을 들어 보아라/백성들이 말을 해도 임금은 모르니/지금의 백성들이 모두 살 곳을 잃었구나//대궐에선 비록 백성들을 근심하는 조서를 내리더라도/고을에선 전해 보는 헛된 종이 한 장에 불과하구나//백성들의 고통을 물으려고 서울 관리를 특파하여/역마로 하루에 삼백리를 달려도//백성이야 문턱에 나설 힘조차 없으니/어느 겨를에 마음 속 일을 진정하겠는가//한 고을에 한 경관이 온다 하여도/경관은 귀가 없고 백성은 입이 없네//급회양을 다시 불러 기용함이 좋으리니/죽지 않고 외로이 남은 백성 구할 수 있으리'. '유민탄' 부분이다.
/김윤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