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정점을 구가하고 있는 디지털 문명은 모든 정보나 지식이 특정인에게 집중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민주적으로 공유된다는 장점을 지닌다. 나아가 다양한 매체가 공존하면서 서로 결합하는 다매체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이는 우리에게 여러 변화를 가져다주었는데 가령 사람들은 '책'보다는 '영상'으로, '사유'보다는 '유희'로, '지성'보다는 '감각'으로 무게중심을 현저하게 이동하게 되었다. 따라서 책 읽기보다는 운동, 요가, 여행, 게임 등이 여가시간을 점령하게 된 것이다.
다양한 매체 공존… '책'보단 '영상'
세계 최초 금속활자 나라 '아이러니'
이러한 환경에서 책이 가지는 문화적 위상은 지난 시대에 비해 매우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언제나 독서 캠페인이 벌어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웃나라 일본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1인당 독서량을 열등 지표로 기록하고 있다. 선진국을 우습게 볼 정도로 급상승한 경제력이 우리의 자부심을 든든하게 해주지만 그 자부심은 문화적 역량의 부실로 인해 삶의 윤리나 가치로 전환되는 데는 여전히 굼뜨기만 하다. 이는 우리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낸 나라라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부끄러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은 현란한 광고로 치장된 처세술이나 경영전략이 아니다. 누가 대신 써준 유명 스타의 자서전이나 감상으로 넘치는 연애시집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예전에 읽었거나 읽다가 중단한 책을 다시 한번 정독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잊힌 자신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활자 자체가 아니라 글자 뒤에 숨어 있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때 독서는 눈으로 읽는 침묵이요 자신과 새삼스럽게 만나는 설레는 상상적 미팅으로 몸을 바꾼다.
글자 뒤 숨어 있는 자기 자신과 만나
독서에는 성취감과 충만함이 있어
책을 읽는 데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는 전자책이 주류가 될 것이라는 예상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인류는 동일한 용도의 물건으로 책보다 나은 것을 발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이책은 더욱 존엄과 권위를 되찾아갈 것이다." 그만큼 책은 질감과 향기, 장정과 스타일로 우리에게 둘도 없는 물질적 원체험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책만이 인생의 스승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우리는 책 말고도 영화, 연극, 게임, 스포츠 등 다양한 문화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독서가 삶의 심연에 다다르는 유일한 길은 아니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가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만큼 독서에는 다른 문화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성취감과 충만함이 있다.
지금도 도심 대형 서점에는 책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 가운데 좋은 책을 선택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 여름엔 자신만의 좋은 책을 손에 쥐자. 자신을 찾아나서는 오래된 여행을 해보자. 지하철에서 남들 다 스마트폰 들여다볼 때 묵묵히 책을 한번 펼쳐보자. 두툼한 볼륨의 양장본도 좋고 얄팍한 두께의 문고본도 좋다. 눈물 글썽이게 하는 비극도 좋고 난경을 뚫고 성취를 이루어간 인물의 논픽션도 좋을 것이다. 분주함의 속도를 잠시 멈추고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침묵의 거울로서의 책을 손에 들어보자. 여름날, 종이책만의 서정을 느껴보자. 어딘가 두고 온 자신을 찾아보자. 늦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그리하자. 책을 읽는 데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