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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개항 도시 인천은 근현대 문화유산의 보고다. 조선이 쇄국을 포기하고 인천항을 열강에 개방하자 근대 문물이 쏟아져 들어온 덕분에 대한민국 최초 유산이 즐비하다. 대불호텔, 애관극장, 팔미도 등대는 제 분야에서 대한민국 1호 건축물이다. 최초의 야구경기가 열린 구도(球都)이자 대한민국 첫 철도노선(경인선)의 한 축이었다. 부두 노동자로 유입된 중국인들은 짜장면의 역사를 열었고, 선교사들이 지은 '내리교회'는 한국의 어머니교회로 불린다. 건축, 스포츠, 음식, 종교를 망라한 근대 문화의 성지가 바로 인천이다.

하지만 제물포를 중심으로 번성한 개항 문화의 피해자들도 있었다. 일본과 청나라를 비롯해 미국, 영국, 독일은 개항장 일대에 조계를 설정해 그들만의 성역을 만들고, 조선인들을 쫓아냈다. 외국인들이 조계지의 제물포구락부에서 희희낙락할 때, 쫓겨난 조선인들은 후미진 곳에서 다시 마을을 만들어야 했다. '배다리'도 그 중 하나이다. 밀물 때 수로를 통해 작은 배들이 드나든데서 유래한 명칭이라는데, 현재 인천 동구 금창동과 송현동 일대가 그곳이다.

개항 역사 한켠에서 시작된 배다리 마을은 인천 원도심의 역사를 관통해왔다. 일제시대에는 국내 최초의 성냥공장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서 식민지 소녀들이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한국전쟁 때는 월남한 실향민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산업화 시대에 유입된 노동자들로 만원이 됐다. 야트막한 수도국산에 거대한 달동네가 들어섰다. 실향민과 노동자들은 자녀 교육에 악착같았고, 가난한 아이들은 헌책방에서 교과서와 참고서를 구했다. 배다리에 헌책방 골목이 번성한 까닭이다. 궁핍했지만 희망의 서정과 서사가 있던 '배다리'였다.

시간이 흘러 나라 전체에 궁기(窮氣)가 걷히면서 배다리의 서정과 서사도 희미해졌다.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과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옛 기억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다섯개 헌책방이 겨우 명맥을 잇고 있으니 헌책방골목의 추억도 듬성듬성하다.

인천시 동구청이 배다리를 살리기 위해 금창동 일대를 배다리 문화·예술의 거리로 지정하고, 2020년부터 올 3월까지 청년, 다문화가정 등 30명의 창업 희망자에게 점포 단장비용과 임차료를 지원했다. 청년 감성으로 창업한 점포들이 배다리 문화를 새롭게 각색해내길 기대한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