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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장석남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115쪽. 1991년 12월20일 출간
여름이라는 단어를 천천히 발음하면 차례로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파도, 바람, 모래, 열기, 우기, 휴가, 땀, 물 같은 낱말들이 하나로 뭉쳐져서 어느새 섬 하나가 내 머릿속을 아득하게 채워놓는다. '섬'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 덕적도에서 태어난 시인 장석남이다.

한국 시단에서 '신서정'을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장석남은 인천 옹진군 덕적도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덕적도를 본섬으로 한 덕적면은 7개 유인도와 39개 무인도가 있는 큰 군도로 알려져 있다.

시인이 유년을 보냈던 덕적도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시인의 형제들은 뭍으로 공부하러 떠났고, 아버지도 돈 벌러 뭍으로 떠났다. 어머니마저 가족의 뒷바라지를 위해 뭍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시인은 할머니와 외딴섬, 외딴집에서 지내다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야 뭍으로 나갔다.

이후 인천남중, 제물포고, 서울예전을 졸업했고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옹진군 덕적도서 초6까지 머물러
고향 이미지·현실 감각 언어 표현

 

그가 등단한 시기는 암울한 시대를 노래했던 민중시 계열이 주류였지만, 70·80년대 민중시와는 다른 실험적 방식으로 시대 현실을 비판한 해체시가 등장해 시단의 한 축을 받쳐주고 있었다. 80년대 말부터는 서정시로 회귀하려는 시인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시단의 분위기 속에서 젊은 시인들은 새로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장석남 시인은 원재훈, 전동균, 권대웅 등과 '90년대를 여는 신서정 7인 신작시집―사랑 찾으러 새 날이 온다'(태성출판사, 1990)는 합동시집을 펴냈다.

이 합동시집에서 신서정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는데, 이후 신서정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계기가 됐다. 90년대 시의 징후들을 엿볼 수 있는 이 합동시집은 '새로운 서정의 움직임'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 중심에 장석남 시인이 있었다.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1) 이후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 2017)까지 총 8권의 시집을 출간한 장석남 시인은 한국 서정시의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면서 자신만의 시적 영역을 개척했다. 90년대 초 서정 시인들의 등장에 대해 다소 거칠게 비판하던 목소리들도 있었다. 당시 시인들은 '광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 놓였던 장석남 시인의 시를 전혀 다른 시선인 정치적 상상력으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시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은 '광주의 상상력'이며, '의도적인 정치시'들로 '2부'를 구성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다분히 정치적인 서정시라고 할 수 있겠다.


1 찌르라기떼가 왔다/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검은 새떼들//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찌르라기떼 속에/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2…(중략)…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후략)(새떼들에게로의 망명 中)


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에서 '검은 세떼들', '환한 봉분', '캄캄한 세월', '봄 하늘' 등의 표현에 주목하면서 읽어보면 엄혹한 시절을 살았던 젊은 시인의 고뇌와 불안한 내면을 읽을 수 있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고, 찌르라기떼 속에서 '환한 봉분' 하나를 보아 버린 시인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을 살았다.

이 시는 '검은 새떼들'과 '환한 봉분', '캄캄한 세월'과 환한 '아궁이'의 대비를 통해서 시대적 상황을 흑과 백으로 보여주고 있다. '새떼들'에게 망명해 봤자 더 공포스럽고 비극적인 세계에 도착할 것이다.


유년 기억·추억 소환 원형공간에
시대 고민 얹어 미학적 긴장 유지


시 '붉은 구름', '5월', '무꽃', '모란의 누설', '라일락 밑' 등에서도 '광주'를 환기시키는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치한처럼 봄'이 오고 '봄의 상처인 꽃'과 '꽃의 흉터로 남은 열매' 그리고 '세월의 흉터인 우리들'(5월)은 '매맞는 五月', '담벽을 닫은 유인물에서', '충혈된 절벽들이 뛰어내'(라일락 밑)리는 시대를 건너고 있는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앞뒷길 모두 풀과 나무의 푸른 바리케이드로 막힌', '나의 노란 고름들'(무꽃)처럼 고향에서 가져온 이미지들과 현실에서 가져온 감각적 언어로 시대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주로 유년의 기억이나 추억을 소환하여 그 원형적 공간에다 시대적 고민을 얹는 방식으로 미학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에는 장석남 시인의 가장 젊은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별의 감옥'에서 '가책받은 얼굴'로 '나비를 타고' 다니는 시인과 '길에 시달리지 않는' 시인의 고향 덕적도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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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오늘도 망명 중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망명처는 결국 시이다. 시인은 생의 젖은 그림자를 들고 시에게로 망명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