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는 다가오고 몇몇 정읍이 낳은 중요 작가를 헤아려 보는데, 이 고장이 전봉준과 강일순의 땅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 고장에서 난 작가들을 여럿 논의에 올리지 못하더라도 이 문제를 빼놓고는 정읍의 문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태어나기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고창에서 났고, 혁명의 깃발을 높이 올린 것은 고부에서다. 그는 1855년생이라고 했다. 증산교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강일순은 1871년생이다. 그 또한 고부 사람이고, 지금은 고부가 정읍시의 일부다.
증산도 경전인 '도전'에 따르면, 1894년 거사를 앞두고 전봉준 명숙이 젊은 강일순을 찾아가 함께 하자고 한다. 강일순은 이를 거절하는데 무고한 백성들이 희생될 것을 염려해서였다고 한다. 공주 우금치에서의 '최후' 결전을 앞두고 강일순은 전봉준을 찾아가 역시 농민군이 희생될 것을 염려하여 전투를 만류했다고도 한다.
전봉준·강일순 만남은 그들의 운명
분명한건 그 시대 같이 지금도 난세
코로나·극심한 경제난과 빈부 격차
전봉준과 강일순의 시대는 난세 중의 난세였다고 할 것이다. 안으로 부패한 조선 관리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수탈을 서슴지 않았고, 밖으로부터는 청나라와 '양이'와 '왜'가 조선을 둘러싼 패권을 노리며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탐학과 환난에 지친 백성들은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고 있었다. 임란 이후 '정감록'의 예언과 '남조선'의 이상을 꿈꿔온 백성들 앞에 경주 사람 최제우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포교 3년 만에 처형을 당한 그이지만 그가 남긴 원리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는 가뭄 속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고부 사람 전봉준에게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 즉 마음을 지켜 하늘을 공경하는 길로, 그러면서도 보국안민(輔國安民)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원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지방에 만연한 탐학을 씻어버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일본을 몰아내고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번 죽고자 하는 마음뿐"이라는 그의 말에서 동학의 개벽 사상이 그에게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강하게 시사한다. 전봉준에게 동학은 세속적 질서를 전변시킬 수 있는 원리였다.
강일순은 달랐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에는 저 옛날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열심당원들이 많았던 것처럼 동학교도들이 많았다. 예수의 시대에 열심당원들은 로마제국과 헤롯왕의 압제에 맞서 무력투쟁을 추구했던 사람들이었다.
예수가 사랑과 용서를 설파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일순 증산이 상극에서 상생으로, 원한을 풀고(解寃) 함께 사는(相生) 길로 나아가자 했을 때도, 이를 이해하는 것은 그 난리 세상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야흐로 박두한 혁명의 시대에 목숨을 바쳐야 할 장두의 운명을 타고난 전봉준과 이 비극적 영웅의 죽음을 뒤로 하고 동학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강일순의 만남이란 그 얼마나 숨 막히는 장면이었을까.
과연 두 사람의 길 가운데 어느 쪽이 옳았던가? 이런 질문은 어리석다. 누군가 어떤 길을 선택할 때 그는 그쪽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새정부, 극복 할 힘 아직 못 보여줘
민중 세상 외친 이들 얼핏 보여줬나
분명한 것은 전봉준과 강증산의 시대와 꼭 같이 지금 이 시대가 난세 가운데 난세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괴질'이 번지는 가운데 정부는 바뀌었지만 국민들의 삶은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빈부격차는 더욱 극심해지고 있다. 정치는 특권 배분과 경제적 야합의 도구가 되어 있고, 새로운 정부는 아직 이를 극복할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
'백성'들은 새로운 '남조선', 따뜻한 남쪽 나라, 그 이상향을 꿈꾸지만, 민중 세상을 외친 이들도 이를 가져다 주지는 못할망정 얼핏이라도 보여주기는 했던가?
그러나 그것이 어떤 후천개벽이든 지금 우리는 새 개벽을 꿈꾸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다. 과연, 난세의 세상이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