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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정조 18년은 1794년으로 다산의 나이 33세 때였다. 그해 6월 아버지 상으로 입었던 복을 벗자, 7월23일에 성균관 직장이라는 벼슬이 내렸다. 10월27일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다가 28일 홍문관 수찬으로 옮겼다. 그날 밤 임금에게 불려간 정약용은 29일에는 경기도 암행어사에 임명되고 11월15일까지 암행어사로 행했던 일을 복명하라는 엄한 명령을 받았다. 임금의 높은 신임에 능력까지 뛰어난 정약용은 공정하고 청렴한 공직자로서의 모든 지혜를 발휘할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정말로 잘 나가던 시대의 다산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록으로 전하는 내용이다. 연천(漣川)·삭녕(朔寧)·마전(麻田)·적성(積城) 등 네 고을을 집중적으로 염탐하라는 임금의 뜻이었다.


다산, 임금 최측근 김양직·강명길의
비행·부정비리 샅샅이 밝혀내 직보


현지에 도착해 목민관들의 비행을 살피는데, 현직 목민관들보다는 진짜 큰 부정과 비리의 공직자는 전 연천현감과 전 삭녕군수였다. 연천현감 김양직(金養直)은 궁중의 지관(地官) 출신으로 왕족들의 묫자리를 잡아주는 임금의 최측근이었고, 삭녕군수 강명길(康命吉)은 궁중의 어의(御醫)로 임금의 주치의였으니 가깝기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이였다. 그들의 비행이나 잘못을 말하는 누구도 없어 그들은 5년이 넘도록 오랜 재임기간에 온갖 못된 짓을 했지만 무사하게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상태였다. 강직하여 불의를 참지 못하던 정약용은 아무도 건들지 못하던 김양직과 강명길의 부정·비리를 샅샅이 밝혀내 임금께 직보하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김양직은 5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온갖 악한 짓을 했습니다. 마음씨가 밝지 못한 데다가 술타령만 일삼고, 탐학한 정치만 하면서 기생만 가까이 했습니다…'라고 시작되는 보고서에는 숨겨진 비행 모두를 시원스럽게 폭로하였다. 강명길에 대해서도 '늘그막에 탐욕이 끝이 없고, 야비하고 인색함이 매우 심한 자로서 백성의 소송과 관무(官務)에는 머리를 저으며 관여하지 않고, 식비와 봉록을 후려쳐 차지하고 멋대로 거두어들였습니다…'라는 엄혹한 내용의 비행을 샅샅이 밝혀 묘당(廟堂)을 거쳐 임금께 보고하게 했다. 그러나 대신들조차 그런 임금의 최측근의 비행을 폭로한다고 처벌받을 사람들이 아니라면서 그냥 묵살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에 정약용은 임금께 직보하는 용기를 발휘했으니, 그의 유명한 상소 '경기어사복명후논사소(京畿御史復命後論事疏)'가 바로 그 글이었다. '김양직·강명길 이 두 사람의 죄악은 목민관 제도가 생긴 이래 참으로 들어보지 못했던 비행입니다.(兩人之罪 誠有守令以來 所未聞也)'라는 극언을 하면서 이들의 옛날 공로를 인정하여 약하게 처리하는 것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냥 문책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형정(刑政)의 대체가 무너지는 일이니 절대로 불가하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만인앞 평등한 법' 법치 근간 유지
민생 무겁게 여기며 국법존엄 회복


그러면서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무서운 죄악을 묵과하는 일이 나라의 통치에 얼마나 무서운 후유증을 남기는가를 상세히 주장하였다. 이런 악인들을 처벌하지 않고 그냥 두면서 어떤 죄인을 처벌할 수 있을 것인가라면서, 법 적용의 큰 원칙까지 주장했다. '대체로 법률의 적용은 마땅히 최측근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用法宜自近習始)'라면서 그렇게 법이 법대로 적용될 수 있어야만 '민생을 무겁게 여겨서 국법이 존엄하게 된다(以重民生 以尊用法)'라는 만고의 진리까지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역사 이래로 모든 통치자들은 법치를 외치고 상식을 외쳤지만 그렇게 실천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근본원인이 만인 앞에 평등한 법인데, 적용하는 사람과 적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한 법치의 근간은 무너져 버리고 만다는 것을 다산은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오늘의 정약용과 정조는 누구인가


임금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5년 동안이나 현감 노릇 해먹으면서 목민관 제도가 생긴 이래로 들어보지 못한 죄악을 저질렀으나, 아무도 임금께 아뢰는 사람이 없어 잘 먹고 잘 살아가던 탐악한 벼슬아치를 법대로 처벌하라는 암행어사 정약용은 그 나름대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여 마지막까지 올바른 주장을 폈었다. 만약 그때 정조가 그런 상소를 묵살하고 말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현명한 신하 위에는 언제나 현명한 임금이 있기 마련이다. 정조는 다산의 '복명소'를 받아들고 왕부(王府)에 명하여 그들을 즉각 처벌하도록 했다. 조선 후기 문예부흥 시대라는 정조의 치세는 그렇게 이룩되었다. 법이 최측근으로부터 적용되기 시작했고, 민생도 무겁게 여기면서 국법의 존엄함도 모두 살아났다. 오늘의 정약용은 누구이고, 오늘의 정조대왕은 누구인가. 두 분이 그립기만 하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