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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문화평론가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더니 요 며칠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시 구절이 떠오르는 파란 하늘의 연속이다. 꼭 푸르른 날이 아니어도 그리운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다. 떠나간 사람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길 때면 사진을 찾아보기도 하고, 차 한 잔을 마셔보기도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만약 납골당이나 묘지 외에 다른 곳에서도 함께 그 사람을 추억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어떨까? 꼭 누군가를 추모하거나 애도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납골당·묘지외 추억 잠길 곳 있으면
英 '메모리얼 파크' 평범한 동네 공원
세상 떠난 아이들 기리지만 친근해


몇 년 전, 영국에 갔을 때 인상 깊었던 장소가 있다. 아이들이 손을 뻗으면 손쉽게 만질 수 있을 만한 키 낮은 가로등에 색색의 풍선이 매달려 있었다. 영국에 공원이 워낙 많긴 하지만 이런 가로등이 있는 공원은 흔치 않다. 공원을 걷다보면 한쪽에 작은 수로가 조성되어 있다. 맑은 물속에 누군가의 이름을 새긴 돌들이 가득하다. 모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이름이다. 수로 주변에는 오늘 아침에 꽂아두고 간 것처럼 싱싱한 꽃다발들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고 '내 정원에 온 걸 환영해요(Welcome to my garden)'라고 적힌 돌 옆에 활짝 웃는 아기의 사진이 함께 자리한다.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적은 편지도 꽃다발 옆에 꽂혀 있다.

이 공원은 영국 미들랜드 지역 버밍엄에 위치한 '메모리얼 파크'로, 일찍 세상을 떠난 발달 장애 아이들을 기억하고 추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발달 장애로 가족을 잃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편하게 공원에 올 수 있지만, 공원 곳곳은 먼저 떠난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엄숙하거나 경직되어 있지 않고 관리와 통제를 받는 공간이 아닌, 평범한 동네 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구석구석에 있는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있고 사람들이 편하게 드나드는 공간은 살아 숨쉬기 마련이다. 그 공간 구석구석에 많은 이의 사연과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공원을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차분하게 만든다. 누군가는 힘들 때마다, 혹은 생각날 때마다 이 곳에 찾아와 꽃을 건네면서 함께한 기억을 떠올릴 테다.

넷플릭스 시리즈 드라마 '버진 리버'에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웃이자 친구인 '릴리'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호프'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자기가 얼마나 친구에게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떠난 후에 더 확실히 알게 되면서 친구의 빈 자리를 힘들어하는 '호프'와 릴리의 딸이 이야기를 나눈다. 엄마가 그리운 딸은 곳곳에서 엄마가 느껴지는 공간에 가면 괴로우면서도 즐겁다면서 자신이 슬픔을 극복해나가는 방법을 공유한다. "엄마가 좋아할 만한 곳을 고르는 거예요." "그러곤 뭘 해?" "아무것도요. 그냥 추억에 젖는 거죠." 시큰둥하던 호프는 결국 릴리가 정성으로 가꾸던 정원에 벤치를 가져다두고, 그 마음을 아는 또다른 이웃은 방석과 쿠션으로 그 벤치를 꾸며준다. "내 인생에 큰 구멍이 생겼다"며 힘들어하던 호프는 그 벤치에 앉아 릴리를 그리워하는 시간을 통해 자신만의 치유 방법을 찾아간다. 드라마는 사고 후유증으로 뇌손상에 시달리는 호프가 벤치에 앉아 릴리를 그리워하자 꿈처럼 릴리가 실제로 나타나 위로해주는 것으로 끝나는데, 추모와 애도에도 제대로 된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韓, 사회적 추모·환기 방안 고민 부족
'집단기억 장소적 의미 중요' 지적도


그동안 세월호뿐만 아니라 삼풍백화점, 인현동 화재사건 등 사회적 참사가 많았음에도, 제대로 희생자들을 기리고 사회적 추모와 환기를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고민은 여전히 부족하다. "진정한 공동체란 기억의 공동체인 것이다. 집단 기억으로 장소적 의미가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공공성에 기반을 둘 때 가능"하다는 현광일의 지적을 특히 새겨볼 필요가 있다. 세월호뿐만 아니라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참사나 재난과 관련해 지역과 공동체의 집단 기억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고민해볼 때다.

/정지은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