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로 인한 전지구적 위기에 세계 각국이 머리를 맞댄 지 오래됐다. 하지만 각국의 이해 충돌로 대책이 지지부진한데,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 규모는 확대되는 실정이다. 우리는 스콜성 기습 폭우가 지속되면서 많은 피해를 남겼지만, 지구촌 곳곳은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스페인 서부 카세레스주의 발데카나스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7천년 전 거석 유물인 '과달페랄의 고인돌', 일명 '스페인 스톤헨지'가 웅장하게 솟아났다. 중국에선 양쯔강이 마르자 600년 전 석불 3개가 발견돼 화제다. 폭염과 가뭄으로 수몰됐던 유적들을 마주하는 아이러니에 표정 관리가 애매해진다. 스페인 스톤헨지를 박물관이나 고지대로 이전하자는 여론이 있다지만, 이런 가뭄이 지속된다면 옮길 이유가 없다. 양자강의 물이 마르면 적벽대전의 박진감도 반감되고, 중국 문명이 위험해진다.
폭염은 인류의 문화유산뿐 아니라 추악한 만행도 남김 없이 백일하에 드러냈다. 수위가 낮아진 다뉴브강엔 독일 군함 수십 척이 떠올랐다. 2차 세계대전 때 강을 따라 후퇴하던 중 난파한 군함들이라 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마주한 나치와 히틀러의 광기는 마치 수장 불가능한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상징하는 듯싶어 가슴이 서늘하다. 미국에선 후버 댐으로 생긴 미드 호수 바닥에서 네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미 수사 당국은 라스베이거스 갱단들의 살인 사건으로 추정하고 수사에 나섰다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생명을 증발시키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성선설'이 무색하다.
예측 불가능한 기후 대격변이 자연생태계와 인류문명을 동시에 위협하고 있다. 북극 동토층이 녹아내리면서 탄저균이 풀려났다. 공룡시대의 바이러스와 세균들의 출현은 시간문제다. 그 와중에도 인간의 욕망은 녹아 생긴 북극항로와 에너지를 차지하려는 경쟁으로 뜨겁다.
인간의 문명을 유지하는 식량, 에너지, 천연자원 등이 모두 기후변화로 인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국가 단위의 생존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 틀림없다. 이상 기후로 드러난 유적과 사건·사고의 흔적들은 인류를 향한 경고일지 모른다.
기후변화로 문명 아래 숨어있던 인간 본성을 일깨울까봐 무섭고 두렵다. 자연재해의 틈새에서도 손익을 헤아리는 인간의 욕망 말이다. 본능적 욕망만 난무하던 문명 이전의 세상을 재촉하는 기후변화라면 악몽이다.
/윤인수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