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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서정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그것을 순간적으로 초월하려는 상상력 사이에서 펼쳐지는 언어 예술이다. 따라서 합리적 이성으로 현실을 파악하는 과정과 상상에 의해 새로운 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서정시의 커다란 두 개의 축을 구성한다. 자연스럽게 그것은 복잡한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를 마련하여 그 경계로부터 새로운 삶의 자양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할 만한 서정시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끝없이 질문하고 그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경험해간다. 이러한 서정시의 좌표와 행방을 보여주는 사례들 가운데 먼저 릴케의 시 한두 구절을 읽어보자.

'당신에게 위안을 주는 이라고 해서 그가 자신이 하는 말처럼 소박하거나 평탄하게 산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이 역시 어려움과 슬픔 속에 살고 있으며 당신보다 훨씬 더 지쳐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당신을 위안할 수 없었으리라'. 


시간 흐름속 완성 예술임은 분명
삶의 언어예술로 봐도 마찬가지


마음과 대상, 상처와 위안, 순간과 영원에 관한 시인의 사유에 공감하면서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에게 느끼곤 했던 존재의 넘침과 모자람을 동시에 생각해본다. 위안을 주는 사람이 사실은 위안을 필요로 했던 사람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고통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위안하고 누군가에게 위안을 받는 마음을 상상해본다. 주어가 사실은 목적어였다는 진실이야말로 서정시의 역설적 지점과 매우 닮았지 않은가. 어릴 때 열심히 읽었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도 선연하게 떠오른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그리하여 너희 사이에서 하늘 바람이 춤추게 하라/서로 사랑하라/하지만 그것으로 서로를 구속하지는 말라/그보다 너희 영혼과 영혼의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펼쳐 놓아두라/서로 잔을 채우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서로 빵을 나누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더불어 노래하고 춤추고 즐거워하되 모두는 스스로 혼자 있게 하라/현악기 줄이 하나의 음악을 울려도 저 혼자 하나이듯이/서로 가슴을 주되 그 안에 묶어 두지는 말라'.

이러한 마음에는 집착과 자유라는 사랑의 양면성이 담겨 있다. 서로 함께하지만 둘 사이에 어떤 거리를 둠으로써 그 사이에 하늘 바람이 춤추게 하고, 영혼과 영혼 사이에 바다를 출렁이게 하고,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즐거워하면서도 스스로 혼자 있게 하라는 권면은 '현악기 줄이 하나의 음악을 울려도 저 혼자 하나이듯이' 다가오는 서정시의 존재론을 그대로 들려준다. 오직 커다란 생명의 손길만이 가슴을 간직하게 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 가능해지는 상상적 세계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발화를 통해 삶의 순간적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서정시가 시간의 흐름에 의해 완성되고 그것을 향수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시간예술로서의 속성은 매우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서정시가 시간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예술이라는 면에서도 그러한 진술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서정시를 삶의 순간적 파악에 기초한 언어예술로 정의한다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만큼 인간은 물리적인 시간 속에서만 살지 않고 자기만의 고유한 시간 속에서 저마다의 실존을 영위해간다. 시간이란 물리적 실체로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구체적 경험 속에서 구성되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만의 고유 실존 영위
따뜻한 말로 사람들 정서적 위무
그순간 잃었던 존재의 원형 회복


이러한 바탕 위에서 생성되는 서정시는 그리움과 따뜻함을 주조로 하는 중용과 위안의 언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위무해간다. 그 순간적 충만함에 의해 우리는 시간의 가혹한 흐름 속에서 잃어버렸던 존재의 원형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가능한 것 역시 그 안에 서정시의 호환할 수 없는 위안과 치유의 아우라가 출렁이고 있기 때문인데, 바로 그 지점에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서정시의 역설이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위를 물리친다는 처서가 지났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을 지나 찾아오는 올가을에는 이러한 위안과 치유의 서정시를 한 편쯤 환하게 만나보면 어떨까 한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