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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소설가
내가 최초로 배운 지식은 '시계 보는 법'이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살았던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방 두 칸을 연결하는 마루가 있고, 마루 끝에는 간유리가 끼워진 유리문이 있는 집. 나는 나무마루에 앉아 반사되는 햇빛을 받으며 엄마로부터 시계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방마다 보름달 만한 시계가 걸려 있고 마루에는 추까지 달린 괘종시계가 있었지만 그 사물의 기능에 대해서 전에는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계 보는 법을 배우던 오후에 그 사물에는 새로운 생명력, 모종의 신성한 임무라고 할 것이 부여되었다. 엄마는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린 후 12시와 3시, 6시, 9시를 나타내는 표시를 하고 길고 짧은 막대기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여섯시고, 이건 아홉시고…" 이해가 가지 않았음에도 시침과 분침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각도는 신비로운 도형이나 기호처럼 매혹적이었다. 나중에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읽으면서, 집시 멜키아데스가 들고 온 나침반에 열광하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에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진하고 열광적인 태도는 내가 시계 보는 법을 배우던 모습과 유사했다. 시간이 훌쩍 흘러, 초등학교 2학년인 내 딸은 이제야 시계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우리 엄마와 달리 나는 딸에게 시계 보는 법을 미리 가르쳐주지 않았다. 시계가 알려주는 메시지란 대체로 독촉이 아닌가? 자기 리듬으로 살아가는 게 더 편한 아홉 살 인생은 내버려 두자고. 이렇게 중얼거리다 문득 깨닫고 보니, 우리 집 벽시계들은 전부 숫자가 없고 눈금뿐이다.

엄마가 그려가며 알려준 '시계보는법'
시간흘러 자명종 못읽는 딸 가르치며
특정 시기의 '무지' 신비롭게 느껴져
자라는 모습보며 생기는 '기억의 눈금'
다가올 '앎' 기다리는 마음 경이롭다


당연히 딸은 숫자가 박히지 않는 시계는 읽지 못한다. 그래서 숫자판이 있는 자명종을 들고 온다. 이때부터 '지금이 몇 시인지'라는 퍼즐풀이가 시작된다. 딸의 추리 과정은 이럴 것이다. 1)엄마가 묻는다. "이숲아, 지금이 몇 시야?" 2)시계를 보지만, 각도만 있지 숫자가 없다. 모른다. 3)자명종을 가져와 지금과 똑같은 각도로 분침과 시침을 만들어본다. 4)한참 생각한다. 짧은 바늘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인 시간이고 긴 바늘은 더 어려운데, 다섯 개의 눈금이 한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구단 5단과 같은 원리다. 5)마침내 알아낸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최소 5분은 더 지나 있어서 '지금'은 '아까'로 밀려나고 만다.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 '지금'이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동안 분침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게 딸은 속상하다. '지금'을 맞추기에 시간이 필요한데, 시계는 그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내 머릿속에는 사과만한 자명종을 손에 들고 거대한 시계판 위에서 냉정한 분침 뒤를 종종거리며 쫓아가는 딸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시침은 이름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한 시간마다 방석을 바꿔 앉듯 다음 숫자로 가버린다. 똑딱똑딱. 시계가 알려주는 정확한 시간은 아직까지 딸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시차'가 걸리는 일이라고 할까. 나에게는 이 시기가 매혹적으로 보인다. 일종의 '무지'가 있지만 이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를 기다리는 중인 상태다. 숫자는 배웠고, 시간개념도 배우고 있으니 이제 '유추'라는 회로만 완성되면 시계에서 숫자가 사라져도 딸은 '바늘만으로' 시간을 맞추게 될 것이다. 인생을 두고 특정 시기에만 존재하는 무지. 이 시간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아홉 살의 인생에서 이런 순간은 수도 없이 많을 테고 열 살, 열한 살, 이 이후로도 쭉 그럴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도 그런 시간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무슨 '지'를 기다리는 '무지'의 상태일까? 두 시계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딸은 숫자와 시간 사이의 비포장도로를 자기만의 보폭으로 걷고 있다. 그 애가 더 어렸을 때는 기억에 남을 순간이 최초의 신체 발달에 관한 것이었다. 최초로 속눈썹이 나왔을 때, 위 아래로 대문니가 나왔을 때, 처음으로 뛰어다닐 때처럼 말이다. 지금도 쑥쑥 자라는 중이지만 나에게는 기억의 다른 눈금이 만들어지고 있다. 구구단 6단을 외우는 시기, 시계 보는 법을 배우는 시기, '노래하는 새'와 '딸꾹질하는 새'에 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시기,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앎'들을 기다리는 이 특정 시기의 무지는, 그 마음이 되어보면 정말로 경이롭다.

이 글을 쓰고 나서 시계를 보니 '학교에서 딸이 돌아올 시간'이 다 되었다. 일어날 시간이다.

/김성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