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장수드라마 전원일기를 보면 마을 이장(里長) 역할이 도드라진다. 회의를 소집해 마을의 대소사를 정하거나 주민 간 다툼을 조정하는 등 어른의 면모를 보여준다. 1970년대까지 설 명절에 주민들이 이장님께 세배를 드리는 게 관례였다고 한다. 이장에 대한 전관예우는 시한도 없다. 죽을 때까지 '이장님'이고, '이장님 댁'으로 불린다. 세태는 변했어도 이장은 여전히 지방자치법에 의해 면장이 임명하는 마을(행정리)의 총책임자다.
월 30만원 수당을 받는 말단 신분이나, 이장 직함은 때로 조합장과 시의원 등 선출직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된다.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대표적이다. 김 의원은 스물아홉에 고향인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이장에 선출됐다.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최연소 남해군수와 경남도지사, 행정자치부(현 행안부) 장관에 오른 큰 인물이 됐다. 장관 시절, 이장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힘썼다는 후문이다. 경기 광주 출신인 전(前) 경기도의회 부의장도 10년 넘게 마을 이장을 지낸 경력을 지녔다.
이천시 모가면 한 마을이 이장 문제로 시끄럽다. 주민들이 선출한 새 이장을 면장이 임명하지 않으면서 민관(民官) 갈등이 불거졌다. 주민들이 총회를 열어 임기(2년) 만료 5개월을 앞둔 현 이장을 불신임하고 새 이장을 선출했는데, 면장(面長)이 임명을 계속 미루는 것이다. 주민들은 '절차상 하자가 없는데 이유도 없이 임명되지 않는다' 하고, 면에선 '해임 사유가 안 된다'고 맞선다.
주민들은 면장이 임명을 미루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본다. 소각장 설치에 찬성하는 주민들에 대한 보복성 행정이 아니냐는 의심에서다. 주민자치 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라며 즉각적인 임명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천시청도 주민들의 자치권이 존중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주민들이 대동회를 열어 다수 의결로 결정한 사항은 (면사무소가) 질의할 사안도 아닌 것으로 본다"고 했다.
자치법엔 '이장은 주민의 신망이 두터운 사람 중에서 해당 지자체 규칙에 따라 면장이 임명한다'고 돼 있다. 주민들이 불신하는 이장은 자격을 상실했다고 봐야 한다. 절차적 하자도, 해임 사유가 아닌 이유도 불분명하다. 그런데도 면장이 새 이장을 임명하지 않는 속내는 뭔가. 괴이한 일이다.
/홍정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