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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난 여름 고려 향가를 다시 읽다가 발견한 '보현시원가'와 그 첫 작품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의 첫 구절이 불러낸 질문이다. 향가라면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향가 부터 생각하고 고려향가는 그저 불교의 포교 수단으로 지은 '이념 문학'으로 치부해온 태도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동안 학계에서 고려향가의 문학성보다는 향찰식 표기를 연구하는 언어 연구 대상으로 삼아 오거나 10구체와 삼구육명(三句六名)이라는 향가의 구성적 특성에 관심을 기울여 온 관행도 핑계 감이다.

고려 향가의 문학성에 집중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로는 숱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향찰식 표기 체계를 충분히 규명하지 못한 사정도 있다. 그런데 '보현시원가'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그 창작 동기가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을 노래로 지어 부르기 위한 것이어서 작품별 주제가 뚜렷한데다 11수의 향가를 최행귀가 한시로 모두 번역해 두었기 때문이다. 신라 향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독이 쉬운 편이다.

그중 '예경제불가'는 '마음의 붓으루/ 그린 부처님 앞에/ 절하는 이 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마음의 붓으루(心未筆留)'라는 표현이 평범한 듯 절묘하다.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는 실제 붓으로 그린 불화도 아니고, 돌이나 쇠 같은 가시적 재료로 만든 불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상상 속의 부처와도 다르다. 균여가 노래한 '마음의 붓으로 그리는 부처'는 차라리 진리를 구하는 간절한 마음의 실천 과정에 가깝다. 즉 완성된 부처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미완의 현재불이나 그려내야 할 미래의 부처에 '구세(九世)가 다하도록 절하겠다'는 구도자의 마음 가짐이다.


그려 낼 미래 부처에 절하겠다는 마음가짐
'예경제불가'서 법계는 우주론적으로 확장


표현기법으로 보면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는 이중 은유이다. 은유의 기본적 원리는 추상적 비가시적 개념을 가시적 감각으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부처'나 '마음으로 그린 부처'라고 표현했었다면 이 시의 가치와 감동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마음이 중요하지만 '붓'으로 그려야 오관으로 감지할 수 있는 그림이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 아미타불도 미륵부처도 아닌 만능 만덕을 갖춘 진리의 구현자는 가늠할 수 없는 추상이지만 이제 독자들은 목전에서 보는 듯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

이 표현은 미학적 개념인 '심상(心象)'의 의미를 설명하는데도 요긴하다. 심상은 언어나 음향 등의 자극을 통해 마음 속에 형성된 그림이나 생각을 말한다. 심상은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처럼 느껴진다. 시적 비유나 소설의 묘사는 읽는 사람이 대상을 직접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데, 특히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의 감각과 결합된 표현은 구체적인 심상을 형성하게 만들고 독자들이 작품세계에 몰입하게 한다. 이 현상 때문에 예술작품은 창조자나 창조과정의 감각작용으로부터 자립하여 스스로 보존되는 '감각 존재, 즉 지각(percepts)이나 정서(affects)와 같은 '감각들의 복합체'로 존재하는 일종의 사물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점에서 본다면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의 형상'은 그 자체로 심상이나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례이다. 심상과 이미지를 통한 상상력은 은유의 수사학이지만 언어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경로이기도 하다.

띠끌·절집마다 표기 화엄경 가르침 동시에
문제 해결보다 이익 다투는 어리석음 경종


'예경제불가'에서 부처의 세상인 법계는 우주론적으로 확장된다. 부처는 눈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띠끌마다(塵塵馬洛) 부처님의 절이며, 절집마다(刹刹每如) 부처라는 것이다. 여기서 '티끌마다'와 '절집마다'라는 향찰식 표기는 대구를 이루어 우리말의 멋과 운율을 잘 구사한 표현이거니와 종단이며 종파 혹은 절집에 승려들과 신도들이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인 동시에 형식에 매달려 본질을 뒷전으로 미뤄놓거나 현실 문제 해결보다 진영이나 파당의 이익을 놓고 다투는 '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경종이기도 하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